끈질기게 쏟아 붓던 더위가 꼬리를 내리고, 눈부신 하늘과 서늘한 바람 속에서 가을을 느끼는 순간 작년 이맘때 겪었던 일이 생각났다.
커피향이 유난히 짙던 어느 날 아침, 갑자기 흐드러지게 핀 탐스런 노란 국화꽃이 보고싶었다. 스치는 맘이려니 했는데 웬걸, 한번 스며든 국화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커져만 갔다.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선뜻 마련하는 것이 여전히 쉽지 않아 혼자 끙끙거리다가 은근히 남편에게 귀띔을 했다. 모든 면에 만점을 주기에 넉넉하지만, 애초에 ‘무드 없음’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준 터라 기대할 여지는 없었다. 결국 국화꽃이 빌미가 되어 가을 병을 시름거리며 며칠이 지났다.
어딘가를 다녀오는 남편의 발소리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급히 현관문을 열었다.
두 손에 커다란 봉투를 들고 서있는 모습이, 엄마의 칭찬을 기대하며 학교에서 집까지 단숨에 달려와 100점 짜리 시험지를 내밀던 아들의 어렸을 때 모습과 너무나 흡사해 웃음이 나왔다.
“여보, 당신 국화 보고싶다고 했죠?” 자랑스럽게 말하며 건네주는 봉투를 받아 한아름의 근사한 국화꽃을 기대하며 열어본 순간 아, 나는 할말을 잃고 말았다.
졸망졸망 앉아있는 조막 만한 국화화분 여섯 개. 홈 디포에 갔다가 문 앞에서 파는 99센트짜리 화분을 보고 내 생각이 나서 사왔단다.
“으이그, 그러면 그렇지. 내가 무슨...” 순간적으로 목구멍까지 치미는 실망과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으며 “와, 정말 예쁘다. 어떻게 이런걸 다 샀어요? 고마워요.”라고 말하는 음성이 떨리지 않도록 무진 애를 써야했다. 남편의 안도하는 모습이 야속했다.
어찌 되었든 내 집에 온 생명이니 다음날 커다란 화분을 내어 가지런히 옮겨 심고 열심히 물을 주며 보살폈다. 그러면서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다닥다닥 붙어있던 꽃 몽우리들이 밤새 한꺼번에 터져 올라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 큰 화분이 근사한 꽃구름으로 뒤덮여 향기를 발하는 모습이라니. 감사하지 못하는 나를 보기 좋게 한방 먹이신 하나님의 솜씨에 서늘하던 가슴이 순식간에 치료되었다.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고 하기 힘든 일이 있는데, 가을을 타는 아내를 위해 가장 예쁘고 좋은 것을 고르려고 한참을 엎디어 애쓴 남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즐거워 할 아내의 모습을 그리며 행복했을 그 마음을 과소평가 했다. 새삼 미안하고 감사했다.
그 마음을 헤아렸는지 무궁화도 아닌 것이 일년 내내 피어올랐다. 난 오늘도 국화를 바라보며 ‘지금의 초라함이나 겉모습이 아닌, 마음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기 위해 기도한다.
아름다운 가을, 정신없이 내닫기만 하던 걸음을 멈추고 잠시 주변을 돌아보면 좋겠다.
분명 가을임으로 더욱 서럽고 외롭고 아픈 이들이 있을 것인데, 따뜻한 사랑과 진실한 마음을 담은, 풍성한 가을빛을 머금은 한 아름의 국화꽃을 그들의 가슴에 안겨 줄 수는 없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아주 행복한 가을을 함께 누릴 수 있을 텐데. 물론 꽃보다 아름다운 그 마음을 인하여.
김 선 화
(복음의 빛 선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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