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경(주부)
못다한 이야기 있으면 나중에 차 한잔하지 뭐. 그렇게 너스레를 부렸더니 ‘금요일에 시간 괜찮은데’ 그래서 여기 다시 이렇게 와 있다. 차 한잔하러 간 집에 머물다가 돌아 나오며 안녕하고 뽀뽀하고 다시 들어가 앉아 있는 품세가 영락없이 넉살 좋은 아줌마이다. 아줌마 수다야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무궁하겠지만 듣는 분 입장에선 대단한 결례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결례를 무릅쓰고 아직 식지 않은 창가 책상에 앉아 금요일 아침의 찻잔에 물을 붓는다.
눈꼬리가 유난히 치켜 올라가 있는 아가씨가 있었는데 그녀는 눈꼬리가 내려가 있는 남자를 만나 결혼하면 정상적인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단다. 그래서 그런 남자를 골라 결혼하고 한쪽 눈꼬리는 올라가고 한쪽은 내려온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마리린 몬로가 버나드 쇼우에게 자신의 외모와 쇼우의 두뇌를 닮은 아이를 낳으면 어떻겠냐고 물었을 때 대답 대신 들려준 이야기라 한다. 숲을 바라보고 열린 내집 창문가에서 다시 쓰는 이야기들이 쇼우의 외모와 몬로의 머리가 되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미국 생활 14년 만에 한국에서 보냈던 1년8개월의 우리 가족 생활기를 몇 번에 걸쳐 써보려 한다.
새벽녘 잠자던 아이의 방에서 느닷없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나쁜 꿈을 꾸었으리라는 생각에 들어가 이불을 고쳐주니 다람쥐에게 쫓기는 꿈을 꾸었다고 하소연 한다. ‘괜찮아 개꿈을 꾸었구나. 키 크려나 보다.’하는 위로의 말에 아이는 정색을 하고 ‘개꿈이 아니고 다람쥐 꿈!!’한다. 다람쥐를 개로 알아듣는 바보 엄마!
그것이 벌써 2년여 전의 일이다. 그 때 다람쥐 꿈을 꾸는 아이가 8학년이었고 그런 아이를 데리고 우리 가족에게 한국으로 돌아갈 기회가 생겼다. 아이는 영어로 묻고 부모는 한국 말로 대답하는 이상한 가족 관계를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한국 행을 결심하게 됐는데 남편은 이번이 아이에게 한국을 배우고 느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 생각했고 그래서 나를 포함한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 중학교로의 전학을 감행했다.
악명 높은 한국의 교육열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바이라 아이의 교육 문제가 제일 걸림돌이었다. ‘응애’ 할 때 안고 와서 겨우 한글 읽기를 깨우친 아이의 수준으로 보면 중학 2학년 12월의 문턱은 생각만으로도 골치가 아팠다. 한국 중학교 참고서를 몇 권 구해서 들여다 봐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는지 신통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자 가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아이를 꼴찌를 해도 좋으니까 즐겁게 친구 많이 사귀고 오자고 설득해서 14년 동안 해묵은 짐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우리 가족이 짐을 푼 곳은 광교산 옆 자락에 들어선 새소리 좋은 용인 수지의 깨끗한 아파트 이었는데 바로 뒷산에 새로 지은 시설이 훌륭한 중학교가 있었다. 찾아간 학교의 교장 선생님과 교무 주임 선생님은 친절하고 반갑게 맞아 주셨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많은 선생님의 자녀들이 조기 유학을 가있다는 사실이 재미있었다. 그 학교에도 외국에서 살다 온 아이들이 여러 명 있지만 보통 2-3년 정도이고 우리처럼 14년을 살다 온 경우는 없다면서 이제 곧 3학년이 되니까 공부가 많이 힘들어질 텐데 2학년을 다시 시작하면 어떻겠냐고 조언을 하셨다. 잠시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남편은 말했다.
“중2나 중3이나 꼴찌 하기는 마찬가지 일 것인데 한국은 선후배 관계도 중요하고 하니까 그냥 중3으로 보내겠습니다.”
그렇게 올A를 받던 아이의 꼴찌를 맡아 놓은 한국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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