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안 수(동양선교교회 전도사)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마태복음 26:75)
약해지는 믿음·몸
베드로처럼 통곡 후
이상한 힘을 얻어
15년 전 미국으로 신학공부를 하기 위해 고국을 떠나왔다. 40대 중반에 영어로 공부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2년 정도는 견딜만했다. 3년째로 들면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무엇보다 3년 동안 하혈이 심해 얼굴이 노란 은행잎처럼 떴다. 헤모글로빈 12가 정상인데 3이었다. 쓰러지면 죽는다고 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점점 멀어졌다. 자고 일어나면 하나님이 계신 것 같지 않는 의문에 멍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우는 거였다. 나중에는 통곡으로 변했다.
이곳에 왜 와 있는가?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고국에 두고온 남편이 불쌍해서 울고, 아이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해 울었다. 3년이 되어 갈 무렵 하혈이 심해서 결국 자궁을 드러내는 수술을 받았다. 나는 날마다 엉엉 울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짚어 보았다. 베드로처럼 시도 때도 없이 사람 앞에 드러내기 좋아하는 욕심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내 욕심 때문에 모든 사람을 부인하게 된 모양새가 되었다. 가장 견딜 수 없는 고통은 하나님 공부를 하는데 하나님이 사라진 것이었다. 나는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의 심정이 무엇인지 뼛속까지 경험하게 되었다. 날마다 울었다. 울면서 이상한 힘을 얻게 되었다. 베드로의 통곡이 나를 구원했다
울 수 있는 용기는 자신을 구원한다. 스스로 울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울게 한다. 미래를 향한 울음이 아니다. 처절한 울음이다.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는 죄책감에 통곡했기에 죄책감이 사라지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에너지를 얻었다.
예수를 배신한 유다도 울 수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유다는 울 수 있는 공간을 가져보지 못한 채 자신을 포기해버렸다. 버지니아텍 조승희도 울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면 그토록 무참하게 총으로 난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다와 조승희는 닮은 데가 있다. 울 수 없다는 치명적인 무력감이 그들을 자살로 몰아갔을 것이다. 울고 싶을 때 울음으로 돌아가는 그런 세상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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