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스위스 알프스의 눈길을 운전하던 나는, 마치 주먹만한 눈꽃송이들 앞을 천천히 퍼레이드 하듯 지나가던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렇지만 지난주 나는 그 때의 그 황홀하던 추억과는 달리 이 남가주의 눈 속에 갇혀 버렸다.
LA 교외 하이 데저트 지대인 우리 동네에 많은 눈이 내려 집 주위가 온통 하얗게 덮였다.
반가운 첫 눈을 창밖으로 볼 때는 마냥 좋기만 하였고, 적당히 눈이 쌓이자 눈싸움도 하고 커다란 눈사람도 만들었다. 그런데 하루 종일 그침없이 뿌려지던 눈은, 다음날 아침 문을 열기도 힘들만큼 쌓였다.
다행히 차의 시동은 걸렸지만 코끼리만큼 부풀어 버린 차가, 어떻게 저 눈 속을 헤치고 100미터나 되는 드라이브 웨이를 빠져 나간단 말인가? 아예 나갈 일을 포기하고, 땔나무를 잔뜩 넣은 벽난로 앞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차를 마시고 있자니, 마치 내가 학생 때 보았던 영화 ‘7인의 신부’의 신세가 된 것 같았다. 눈이 계속 올 것이라는 뉴스에, 이러다 그 영화처럼 봄까지 갇혀 버리는 건 아닐까? 이참에 그동안 바빠서 볼 엄두를 못냈던 DVD들을 보면서 모처럼 남편과 함께 ‘홈 릴렉스드 홈’을 즐겼다.
그렇게 눈 속의 낭만을 즐긴 다음날 아침, 여전히 수북한 눈 속에 갇힌 차를 보자 엄두는 나지 않았지만, 주말의 중요한 약속 때문에 남편과 함께 그 긴 드라이브 웨이에 쌓인 눈을 조금씩 치우고 있는데, “문명으로부터의 고립이 이런 거구나!”하는 생각에 문득 푸치니의 출세작 ‘마농 레스꼬’가 떠올랐다.
‘데 그리외’는 죄수가 되어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추방당하는 애인 마농을 따라 루이지애나까지 가게 된다. 기회를 엿보던 데 그리외는 마침내 마농을 탈옥 시키지만, 두 사람은 물도 인적도 없는 낯선 사막 한 가운데로 들어선다. 열병이 생겨 목이 타는 마농을 위해 물을 찾아 나섰던 데 그리외가 빈손으로 돌아오니, 마농은 죽어가고 있다. 기껏 함께 새로운 삶을 이루어 보려다 죽어가는 애인을 눈앞에 두고서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어 데 그리외는 울며 마농을 끌어안고 절규하는데 마농이 말한다: “내 죄는 잊어도 내 사랑은 영원히 기억해 주세요!”
눈을 치우며 시려오는 손과 발을 부비고 있을 때, 이 눈 속에 갇힌 우리 부부를 구출해 주려고 LA에서 우리집까지 택시를 보냈다는 친구의 전화가 왔다. 그 거리가 얼마인데…! 찡~하게 전해져 오는 친구의 마음에 눈물이 핑~하였다. 그 말에 눈 치우던 삽을 눈 속에 던져 놓고 급히 샤워를 한 후 짐을 챙겨 눈밭을 헤집고 큰 길로 걸어 나와서 택시를 기다리는데, 날이 차가워져 피부에 씽씽 와닿는 찬바람! 눈 속을 딛고 왔던 신발이 조금씩 차가워 지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 내게는, 사랑하는 마농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데 그리외 와는 달리, 이 눈 속에서 우리를 꺼내 주려고 친구가 보내는 구조의 손길이 오고 있지 않은가! 가서 나를 기다리는 친구를 만나 따끈한 수프가 있는 저녁을 함께 할 생각을 하니, 찬바람 속에 발은 더 시려 왔지만 가슴 속은 따뜻~하기만 했다!
라디오서울 ‘김양희의 이브닝 클래식’ 진행자
sopyh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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