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벗고 가난한 한 흑인 소년이 예배를 드리고 싶어 교회를 찾았다. 예배당은 잘 차려입은 사람들로 그득 찼다. 초라한 흑인 소년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얼굴을 찌푸린다. 그리고 쫓아냈다. 교회 문이 닫힌 것이다.
소년이 교회 문밖에서 쭈그려 앉아 울고 있노라니까 어떤 사람이 다가와 같이 앉았다. 소년이 물었다. 당신은 누군가고. 그 사람이 말했다. “나는 예수다. 그런데 나도 교회에서 쫓겨났다.”
교회가 욕을 먹는다. 교인들이 손가락질을 받는다. 그러면서 유행하는 말이 ‘예수는 좋은데 교회는 싫다’는 말이다.
꽤 부흥을 하는 것 같았다. 은혜가 넘친다. 그러던 교회가 어느 날 분규에 휘말린다. 그 싸움이 점차 커진다.
그 싸움이라는 게 그렇다. 교회의 본질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기실에 있어서는 교회쟁탈전이다. 그게 교인쟁탈 패 가르기 싸움으로 변하면서 이윽고 재산싸움으로 번진다.
목소리 큰 사람들만이 판을 휘젓는다. 상황이 이쯤 되면 뒤따르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조소다. 바람 잘 날이 없다고 할까. 이것이 숨길 수 없는 한인 개신교계의 오늘날 모습이다.
이 교회싸움의 최대 피해자는 그러면 누구일까. 은혜를 사모하여 교회를 찾아왔다가 상처만 입고 돌아서는 무명의 신도들이다. 아니, 그보다도 더 큰 피해자는 예수다. 그 싸움의 와중에 가장 먼저 교회 밖으로 내동댕이쳐져서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게 개신교 교회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이다. 개신교에 대한 신뢰지수는 18%로, 불교(31.1%)에 크게 뒤떨어진다. 그리고 천주교, 불교 등 신자 수는 늘고 있는 데 반해 개신교 인구수는 계속 줄고 있다.
분규가 그러면 교회발전에 반드시 장애요인 역할만 하는 것일까. 그도 아니라고 본다. 교회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그런데 분쟁이 없다. 이는 지상에서는 불가능하다. 어디까지나 천국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문제는 갈등발생 이후가 아닐까. 참고 또 참는다. 스스로의 키를 낮춘다. 그리고 사랑으로 품고 또 품는다. 교회 안에는 예수만 넘쳐나면서 결국 화해가 이루어졌다.
갈등은 오히려 교회발전의 큰 모멘텀을 이루었다. 분규를, 갈등을 이해와 화해로 이끌어 내면서 그 교회의 영적인 키 높이는 한 뼘 이상 자란 것이다.
분규가 발생했다. 갈등이 날로 확산된다. 교회가 깨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없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가 갈등을 극복하고 세상을 향해 찬란한 빛을 발한다. 교회의 터는 더 넓어지고 굳건해진 것이다. 이제는 그런 교회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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