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12일, 월요일 (Tallmadge City & Mr. Baker Family)
오늘은 가장 긴 날이 될 것 같다. 이민 와 18년간의 우리의 애환이 담긴 곳을 더듬어 볼 생각이다. 우선 우리가 이민 와 우리 4식구 가 웅지를 트고 2식구가 불어나 6식구가 되기까지 4년 넘게 살던 아파트에 들렀다. 이곳에서 낳은 두 아이 가 장성 헤서 벌써 한 아이의 아빠 와 엄마 되고, 내가 벌써 70이라는 나이에 이른 세월이 지난 것만, 이곳 아파 나 주위 환경이 별로 변한 것이 없어, 우리만 따로 늙은 것 같아 좀 서운했다.
남자 아이같이 개 구장이 같던 둘째 딸, 선아가 놀다 떨어져 나와 아빠를 그렇게 놀라게 했던 이층 계단도 하 나도 변하지 않고 거기에 그대로 있었다. 선아가 사흘이 멀다고 바지엉덩이에 구멍을 만들어오던 나지막한 콘크리트 언덕도 하나도 변하지 않고 거기에 그대로 있었다. 학교가 집에서 가까워 영아와 선아가 손잡고 유치원가던 오르내리던 언덕 샛길도 하나도 변하지 않고 거기에 그대로 있었다. 변한 것은 우리가 이곳 살지 않는다는 것 뿐이다. 또 있다. 말도 잘 안 통하는 나에게 그렇게도 친절하게 많은걸 가르쳐 주던 금발의 미녀, 톰이 엄마도 이제는 이곳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곳은 현대식 부엌에 따듯한 물이 나오고, 수세식 변소에 냉온방 되어있는 침실 2에 응접실 1가 있는 당시에 우리가 떠나기 전 한국에서 보지도 못하던 우리게는 과분한 문화 아파트였다.
아빠는 우리 3모녀를 필라델피아 후배 집에 맡겨 놓고 혼자 올라와 이 아파트를 구하느라 입술이 부르트고 병까지 나셨다. 아파트 월세 1달치 190불을 선불 하고 나니 주머니에 50불도 못 남았다고 했다. 우리가 한국서 가지고 떠난 총 재산은 현찰 500불과 미국 직장에서 받을 봉급을 담보로 받은 외상 비행기표 4장뿐 이었다. 아빠가 일 주일 40시간 일하고 받은 첫 주급은 계약과 전혀 달랐다. 고용 계약에는 시간당 4불 95전인데 반밖에 안 되는 2불 50전이었다. 소득세와 사회보장세를 공제 하고 나니 90불이 체 되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 수입을 생각 하면 너무 과분하며 비싼 아파트였다.
그래서 나는 식비로 주당 20불을 초과 하지 않는 생활을 2년 가까이 했다. 당시 20불 큰 돈 이였다. 이 당시 처음 미국에 수출된 2기통 혼다 일본산 새 차가 500불 정도였다. 이 당시 미국에 국민 소득은 만 불이 넘지 못했다. 이 아파트는 우리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인 아파트였다. 이 아파트를 떠난 후 한 번 도 아파트에서 더 살아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음 우리는 굳여 팍 (Good Year Park )으로 차를 몰았다. 말이 잘 안 통해 누가 말이라도 걸어오면 걱정부터 앞서던 우리 3모녀가 즐겨 찾든 곳이다. 집에서 5분 거리라 자주 나와 우리 3모녀 뒹굴며 놀던, 무수한 노란 민들레꽃으로 수놓아진 파란 넓은 잔디밭, 서울 운동장 보다도 몇 배 나 크게 보였던 대 초원 같고 평화스럽던 그 큰 공원이 오늘은 별로 크지도 않고 그렇게 옛날처럼 아름답지도 않아 보인다. 그 동안 많은 아름답고 큰 주립 및 국립 공원을 보았기 때문 인가? 시각적인 감각도 계속 업 그레이드 되나 보다. 우린 더 아름답고 새로운 것을 보려고 긴 여행을 떠난 것 같다.
다시 차를 돌려 탈 메지 서클을 지나 팬우드 드라이브로 들어와 우리 6식구가 14년이나 애지중지 가꾸며 살던 번지수도 변하지 않은 802가 우체통에 붙은 집에 도착했다. 여름 이면 둘째 딸 선아가 동래 아이들 과 수영하기 좋아해 늘 동래 아이들이 많이 모였던 집이다. 우리가 심어 놓았던 작은 나무들은 자라 집 전체 을 그늘로 감싸고 있다. 한 때는 시부모님 두 분 모시고 같이 살아도 불편 없었던 야외 수영장이 딸인 큰 집 이였다. 20년이 지나 찾아온 고향과 같은 동래가 이제는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게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 온 동네가 숲으로 변해 있었다.
눈이 오면 아빠가 쉽게 차고에 들어 올 수 있도록 온 식구 나가 눈싸움도 하며 눈을 치던 긴 드라이브웨이도 무성한 나무로 그늘 지어 있다. 다만 여름이면 시원 하게 물을 뿜던 집 앞 작은 분수대는 보이지 않았다. 딸 하나에 두 입양아를 극진히 정성껏 잘 기르던 옆집 미스터 룩코비니 부부도 볼 수 없었다. 우리가 살 때는 부모 들이 모두 젊어 아이들도 많아 스쿨버스오면 동래가 시끌버끌 시끄러웠는데, 지금은 정막감 마저 느낄 정도로 너무 조용하다. 동네가 40년이 다 되었으니 젊은 세대는 없고 노인세대로 채워 진 것이다. 요즈음 미국에 중산층 젊은 세대는 새롭고 큰집 동네를 선호한다.
집과 나무들은 모두 제 자리에 있는데 옛 주인을 한 사람도 못 보니 왠지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을 느끼며 아이들이 다니던 오버 델 중학교로 차를 돌렸다. 학교는 같은 자리나 학교 건물은 새로 지어 깔끔하고 더 컸다. 4아이들이 공부도 잘 해 주고 많은 상 들 받아, 엄마 아빠를 늘 기쁘게 해서 이민 생활의 어려움을 기쁨과 보람으로 만들어 주며 다니던 학교다. 맏딸 영아가 중학교 1학년 때 과학 경연 대회 에서 1등 상을 받을 때 그 기쁨은 온 세상을 얻은 것보다 크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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