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다큐멘터리를 시청했다. 수생식물에 관한 내용이었다. 연못 위에 눈꽃이 피어나는 모습에 시선이 흘러갔다. 물 위의 요정 어리연꽃에 오래도록 마음이 머물렀다. 여러해살이 수초인 어리연꽃은 연못이나 습지, 호수나 강가 등 물이 깊지 않은 곳에서 자라는 식물이다. 부유식물인 이 꽃은 물 위에 여러 개의 잎이 뜨면 그 잎이 갈라진 틈에 꽃을 피운다. 지름이 2센티미터에서 3센티미터의 아주 작고 실타래가 엉켜 있는 듯한 모양으로 피어난다. 미풍에 흔들리는 어리연꽃은 물 위에서 발레하는 요정 같았다.
어리연꽃은 솜털같이 가냘픈 몸으로 짧은 순간 개화하고 낙화한다.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지는 꽃이다. 하루 개화하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한다니 경이로울 따름이다. 뿌리를 물속에 내리고 잎을 수면 위에 띄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전심전력했을까. 수면 위에 핀 어리연꽃보다 보이지 않는 물속에서 뿌리를 내리는 일이 얼마나 힘든 여정이었을지 유추해 보았다. 가시적인 현상 너머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했을 작은 꽃의 애잔한 몸부림이 느껴졌다. 어리연꽃을 보며 오버랩되는 나무가 있었다.
언젠가 대나무의 싹이 나는 모습을 본 적 있다. 무거운 흙을 뚫고 고개 들고 일어나는 죽순의 모습을 마주했다. 아무것도 자라지 않을 것 같은 곳에서 뾰족하게 머리를 들고 일어나는 죽순의 생명력을 보았다. 생명을 품고 있으면 비록 더딜지라도 언젠가는 싹이 나고 자란다. 대나무는 뿌리를 내리는 기간만 4년이 걸리고 5년째 되는 해부터 빠른 속도로 자란다. 죽순이 다 자라는 기간은 30일에서 40일이고 그 이후부터는 단단해지는 시기다. 죽순의 생장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대나무의 한 시간 생장 속도가 보통 소나무의 1년에서 2년 동안의 생장 속도에 해당한다니 놀랍다.
어리연꽃과 대나무의 생태는 우리 삶과 서로 다른 듯 닮았다. 어리연꽃과 대나무의 침묵과 인내의 시간을 간과할 수 없다. 대나무는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그 이후로 빠르게 성장한다. 땅속에서 침묵하는 시간 동안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을 고요하고 은밀하게 준비한다. 뿌리끼리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어떠한 폭풍에도 요동하지 않는 유연성과 회복 탄력성이 있다. 어리연꽃과 대나무의 시간 뒤에 숨겨진 내밀한 눈물을 누구도 헤아릴 수 없다. 이 둘의 생태는 빠른 속도와 목표 지향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삶의 방식이나 가치관과 이질적인 풍경이다.
자연은 겨울에도 여전히 봄을 준비한다. 광야를 지나는 동안 종종 봄이 오지 않을 듯한 긴 터널을 지날 때가 있다. 사계절 동안 겨울만 계속되는 상황을 마주할 때도 있다. 물은 100도가 되는 순간 끓으면서 기체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임계점이 되면 무엇인가 이루어진다. 그 과정을 통과한 자만 비밀을 알게 되리라. 작은 식물조차도 각자의 영역에서 잠잠히 인내하며 자기 몫의 삶을 살아간다. 작은 것들의 노래가 가을바람에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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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실 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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