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의 초기 히트송 가운데 “정답던 얘기 가슴에 가득하고 푸르른 저 별빛도 외로워라…”로 시작하는 노래가 있다. 번안팝송 ‘제비’다. 원곡은 멕시코의 의사요 왕정 항거 투사였던 나르시소 세빌라가 130여년전에 작사작곡한 ‘La Golondrina(제비)’이다. 프랑스에 포로로 잡혀간 세빌라가 제비처럼 훨훨 날아 고국에 돌아갈 수 없음을 한탄한 망향가이다.
조영남보다 훨씬 전에 낫 킹 콜이 원어(스페인어)로 부른 노래를 듣고 시쳇말로 뿅 갔었다. 빌리 본 악단 연주곡은 요즘도 즐겨 듣는다. 이 노래는 트리오 로스 판초스, 로스 카발레로스 같은 토종가수들과 나나 무스쿠리, 플라시도 도밍고 같은 글로벌 가수들도 불렀고, 만토바니, 제임스 라스트 등 모든 유명 오케스트라들의 레퍼토리에도 빠짐없이 끼어 있다.
오늘 캘리포니아주 최고(最古)의 동네로 꼽히는 샌 완 캐피스트라노에서 ‘제비의 날’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그곳의 천주교 사원으로 어김없이 돌아온 제비를 기리는 축제다. 제비들은 전통적으로 3월 19일경 아르헨티나에서 이 사원에 맨 먼저 돌아와 10월 23일경 남쪽으로 돌아간다. 매년 봄 제비가 마을에 도착한 날 사원은 종을 축포처럼 울리며 환영한다.
이 옛 마을은 1940년대 미국팝송 ‘캐피스트라노에 제비가 돌아올 때’와 특히 ‘쾌걸 조로’ 영화의 원작소설인 ‘캐피스트라노의 저주’를 낸 산실이기도 하다. LA에 살 때 LA-샌디에고 중간쯤에 있는 이 마을을 서너번 들렀다.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 1776년 스페인 천주교 선교사들이 세운 고색창연한 벽돌건물 처마에 해묵은 제비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하지만 요즘엔 아쉽게도 제비들이 캐피스트라노 마을을 외면한다. 해마다 ‘제비의 날’ 퍼레이드가 펼쳐지긴 하지만 제비들은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북쪽 인근 마을인 치노 힐로 직행한다. 동네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사원이 개발붐에 밀려 빌딩 숲에 가리자 제비들이 그보다 더 높은 치노 힐 언덕배기의 골프장 클럽하우스에 보금자리를 튼다고 들었다.
캐피스트라노 마을에 제비 퍼레이드가 열리는 오늘은 공교롭게도 삼월 삼짇날(음력 3월 3일)이다. 강남 갔던 제비가 한국에 돌아오는 날이다. 어렸을 때 살았던 시골집에 해마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제비 한 쌍이 날아와 처마에 집을 짓고 새끼를 길렀다. 어미가 먹이를 물어올 때마다 새끼들이 입을 벌리고 자기 차례라며 아우성치던 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삼짇날은 뱀들도 겨울잠에서 깨어나 땅위에 기어 나오는 날로 치부된다. 그래서 삼짇날을 한자로는 ‘3월의 첫 뱀날’이라는 뜻인 삼사일(三巳日), 상사(上巳) 또는 원사(元巳)로 쓴다. 이 무렵 나비들도 나타난다. 조상들은 이날 노랑나비나 호랑나비를 먼저 보면 그해 소원을 성취할 수 있다며 즐거워했고, 흰나비를 먼저 보면 상을 당할 수도 있다며 근신했다.
요즘은 먹어보기 어렵지만 삼짇날 절기음식도 있다. 우리 조상들은 삼짇날 무렵에 핀 진달래 꽃잎을 따다가 찹쌀가루로 반죽해 둥글게 만든 화전(花煎) 떡을 먹었다는 기록이 ‘동국세시기’에 나온다. 역시 진달래꽃을 넣어 찹쌀가루로 국수를 만든 화면(花麵)도 즐겼다. 찹쌀과 송기와 쑥을 넣은 고리떡, 부드러운 쑥 잎을 찹쌀가루에 섞어서 찐 쑥떡도 있다.
요즘 삼짇날 음식은 따로 있다. ‘삼’(3)이 ‘겹’친 날이라며 삼겹살을 먹는다. 한국의 1인당 삼겹살 소비량은 연간 9kg이다. 파주-연천 축산협동조합이 구제역으로 시달리는 축산농가를 살리기 위한 방안으로 2003년부터 3월 3일(양력)을 ‘삼겹살 먹는 날’로 제정한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11이 겹친 11월 11일이 ‘빼빼로 데이’로 정해진 것과 매일반이다.
오늘이 삼짇날이지만 서북미의 봄은 올해 유난히 늑장을 부린다. 엊그제만 해도 시애틀 인근에 우박이 쏟아졌고 오리건 유진엔 폭설이 내렸다. 벚꽃, 살구꽃은 피었지만 철쭉꽃은 아직 못 봤다. 원래 시애틀엔 여름철새인 제비가 겨울철새인 거위나 두루미보다 드물지만 올해는 제비들이 샌 완 캐피스트라노 마을처럼 아예 찾아오지도 않을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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