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50년전 오늘 시애틀 세계박람회가 개막됐다. 스페이스 니들도 ‘골드 애니버서리’를 맞아 금빛으로 치장했다(그게 원래 색깔이었다). 반세기 전엔 시애틀에 한인이 드물었지만 ‘금 면류관’을 쓴 신축 스페이스 니들에 선착순으로 올라갔을 듯한 한인소년이 있다. 지난 월요일(16일) 시애틀에서 첫 연주회를 가진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정명훈 지휘자이다.
한국에서 ‘신동 피아니스트’로 불린 정명훈은 여덟 살 때인 1961년 가족과 함께 시애틀에 이민 왔다. 비즈니스 안목이 뛰어났던 어머니 이원숙씨가 다음 해 개막될 세계박람회를 겨냥하고 시애틀센터에 식당을 열었기 때문이다. 명훈은 수시로 식당에 호출돼 어머니를 도왔고, 기회가 나면 식당 귀퉁이에 놓인 피아노를 연주하며 손님들을 경탄케 했다.
그는 만당을 이룬 16일의 베나로야 홀 공연이 끝난 뒤 무대인사에서 “시애틀은 고향이나 진배없다”고 털어놨다. 6년간 자라며 레이크사이드 사립학교에 다녔고, “당시 동생 반에 빌 게이츠라는 아이가 있었다”는 농담으로 청중을 웃겼다. 이민 1년 뒤인 50년 전 시애틀심포니와 협연을 가졌고 당시 지휘자는 밀튼 카팀스였다며 까마득한 옛날을 회상했다.
환갑이 다된 마이스트로 정명훈은 연주회에 앞서 리셉션 홀에서 입장객들과 잠시 환담했다. 주름이 좀 늘었지만 더부룩한 머리는 여전했다. 흰색 터틀넥 셔츠에 역시 흰색 파카를 걸쳤다. 검정색 바지는 다리미질도 안 됐고 구두 역시 허름했다. 파카만 검정색 양복으로 갈아입은 채 무대에 나온 그를 보면서 30여년 전에 있었던 그와의 첫 조우가 생각났다.
지난 80년대 초 한국일보 미주본사가 정경화-명훈 남매 초청 연주회를 LA 뮤직센터에서 주최했다. 홍보용 특집기사를 쓰려고 LA 다운타운 에코파크 인근에 있었던 아담한 그의 집을 방문했다. 경화씨가 끓여준 커피를 마시며 두 시간 가까이 얘기했는데, 명훈 총각은 그 때도 더부룩한 머리에 후드 달린 운동복(?) 차림이어서 사진기자가 갈아입혔었다.
그날은 주로 경화씨가 얘기했다. 명훈은 입이 무거웠다. 그에게 질문해도 누나가 대답했던 것 같다. 그래도 “피아니스트에서 지휘자로 진로를 바꿨다”던 그의 말은 또렷이 생각난다. 차이코프스키 국제콩쿠르(피아노)에서 2위에 입상한지 5~6년 뒤여서 얼떨떨했다. 그는 리빙룸에서 하프시코드 건반을 한바탕 질타한 후 “(이젠) 심심풀이지요”라며 웃었다.
그 후 지휘자 정명훈은 승승장구했다. 미국과 유럽의 거의 모든 유명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독일 자르브뤼켄 라디오 필하모닉(1984~1990)을 필두로 파리 오페라, 로마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 등의 상임지휘자를 거쳐 2005년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위촉된 후 ‘서울 필’을 세계 정상급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평가가 16일 확인됐다. 주요 레퍼토리가 자기 전문인 라벨(‘어미 거위’ 조곡)과 드뷔시(‘바다’)였는데 정명훈은 악보도, 지휘봉도 없이 원곡의 분위기를 환상적으로 살려냈다. 이미 지난해 독일 그라모폰과 전속계약을 맺고 이 곡들을 CD로 출반했었다. 하지만, 이날 청중은 한국의 대표적 현대음악 작곡가인 진은숙의 생황(Sheng) 협주곡 ‘슈’에 더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4,000년 전통의 ‘중국판 하모니카’ 또는 ‘입 오르간’으로 불리는 생황은 작년 조수미가 주역으로 출연한 베나로야 홀의 ‘아시아 경축 콘서트’에서도 선뵀었다.
지난 2004년 6월엔 대전 시립교향악단(지휘 함신익)이 시애틀에서 공연했다. 내 고향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지방 오케스트라가 미국 유수의 연주장인 베나로야 홀 무대에 선 것(자비 공연이긴 했지만)이 흐뭇했다. 이번 서울 필 공연의 감회는 그 이상이다. 시애틀 심포니의 공식 초청 연주일 뿐 아니라 연주수준이 시애틀 심포니를 능가했기 때문이다.
그날 한인 청중은 모두 싱글벙글했다. 불경기를 잊고 신명기가 살아난 듯 했다. 삼성 TV나 현대 차보다 더 고차원적인 자랑거리를 얻었다. 송영완 총영사도 만시지탄이라며 “(서울 필이) 적어도 5년에 한번은 와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적으로 동감이었는데, 4~5년마다 받는 재외국민 선거권보다도 훨씬 신명나는 선물이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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