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복음중앙교회> 강승호목사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을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터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나의 애를 긋느니.......” 이순신장군의 기백과 의지와 이상을 보여주는 유명한 시다
28일은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의 탄신일이다. 그의 고향은 충남 아산군 염치면 백암리다. 어릴적부터 활쏘기 말달리기를 즐겼고 자라면서 키가 크고 무용이 뛰어났고 수염이 붉었다. 22세 때 서당을 그만두고 무술 공부를 하여 32세 때 무과에 합격 하였다. 처음에는 함경도 동구 비보권감이라는 미관 말직에서 북방 오랑캐인 여진족의 침입을 방어하던 육군 병사였다.
그러나 1591년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어 왜군이 쳐들어올 것을 미리 예감하여 군사를 훈련 시키고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만든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사를 이끌고 옥포 앞바다에서 왜선 30여척을 격파하고, 이어 사천에서 거북선을 사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 해 7월에는 한산도에 적선 70여척을 무찔러 한산 대첩의 큰 무공을 세웠다. 이어 부산에서 100여척을 격파, 남해 일대 적군을 완전히 소탕한 후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을 삼고 최초의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되었다.
그러나 1597년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안았다는 원균의 모함으로 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목숨을 건지고 도원수 권율(1537-1599)장군 밑에서 백의종군(벼슬없이 전쟁터에 나감)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 수군이 전멸 상태에 빠지자 다시 삼군 통제사로 임명되어 남은 배 12척을 이끌고 명랑해전에서 12척의 전함으로 130여 척의 왜군 함대를 대파하고 재해권을 되찾았다.
그의 뛰어난 전술은 충효의 구국 이념과 의식을 몸소 실천하는 소신을 가졌고, 지휘관으로서 군림하기보다 심부름꾼으로서 예리한 이성과 정확한 판단력이 있었고, 의에 살고 의에 죽는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에 임진왜란 때 침략자를 막았고 중상모략하는 무리마저도 결연히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7년간의 해전을 통해 50여 척의 거북선으로 400여척의 왜선을 격멸 시키는 위대한 바다의 용장이 었고 철수하는 왜군과 노량 해상에서 마지막 섬멸전을 벌이다가 적에 총에 맞아 목숨을 거두면서도 “전쟁이 한창이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고 계속 싸우라!”라는 말을 남겼다.
문장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여러편의 시조를 남겼고 그 책자는 국보 제76호로 제정되어 현충사에 보관 되어있다.
그가 조국애를 노래한 시 “임의 행차 서쪽으로 멀리 가시고 왕자들 북쪽에서 위태한 오늘날 나라 위해 근심하는 외로운 신하들 장수들은 공로를 세울 때로다 바다에 맹세 하노니 용이 흐느끼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아는도다 이 원수 모조리 무찌른 다면 내 한 몸 이제 죽는다고 어찌 사양 하리오” 성경은 말합니다.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한다고 하십니다(잠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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