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택
3월 어느 날 아침 식사를 하며 TV 뉴스를 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워싱턴에 이미 벛꽃이 만발했다는 소식이다. 제퍼슨기념관 앞 호숫가에 늘어 선 하얀 꽃행렬을 보며 나는 그만 혼란에 빠졌다. “아니, 이제 3월 중순밖에 안 되었는데 벛꽃이라니. 그리고 봄 소식은 개나리가 먼저 피어야 하는게 아닌가?”하긴 지난 겨울부터 조짐이 이상하긴 했다. 이곳 필라델피아는 매년 한국과 비슷한 기온을 보여왔는데 이번 겨울은 눈 한번 제대로 오지 않고 사뭇 따뜻하게 보냈다. 어찌 되었던 봄은 이미 온 모양이다. 창을 여니 정말 봄기운이 한창이다. 외출을 할까 생각해 보아도 딱히 갈 데가 없다. 미국생활에 익숙하다 보니 친구를 찾으려 해도 예약을 해야 한다. 소년같은 이 춘정(春情)을 어이하나? 나는 내 서가(書架) 앞을 오가다가 마음 산책을 하기로 정하고 봄에 관한 책을 펴 본다.
조선 말기에 전기라고 하는 중인 화가가 친구를 찾아가는 그림을 그렸다. 매화꽃 한창인 때 술 한병 보자기에 싸 어깨에 메고 산골 친구를 찾아간다(그림:매화초옥도).친구의 이름은 오경석으로 같은 중인 출신이란다. 이 분은 매화골 주인으로 이미 친구가 찾아 올 줄을 알았는지 창문을 열고 피리를 불고 있다고 그림에 써 놓았다. 사랑하는 내 동무 있는 곳은 어디일까. 이 봄 나는 뉘랑 더불어 꽃향기를 맡을꼬.
그림 속 매화향기, 피리소리에 취하다가 문득 화사한 표지의 책이 눈에 들어 온다.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우타노 쇼코 지음. 엷은 연두색 바탕에 커다란 벚꽃을 가슴에 단 처녀의 얼굴이 표지를 장식한다. 옳치. 한국의 옛 봄이 매화꽃으로 상징한다면 일본은 벗꽃이겠지.
직장과 연애 전선에 공히 밋밋한 일상을 거부하는 젊은 주인공은 20대의 나루세. 그는 러쉬아워(Rush Hour)에 오토바이 타고 차 사이를 질주하듯 멋있게 살다가 30이 되기 전에 벚꽃 지듯 그렇게 화려한 죽음으로 생을 끝내리라 생각한다. 정말 어느 날 우연찮게 뺑소니 사건의 진범을 좆는 일에 끼어들게 된다. 죽을 고비고비를 넘기며 수 없이 혼도 나고, 그런 속에 진정한 애인도 생기게 되지만 결국 자신은 영웅이 아님을 알게 되고 연애도 실패한다.
나이 70이 넘어 옛 애인을 다시 만나 이제는 정말 마음에서 울어나오는 대화를 한다. 둘은 여기서 인생을 반추하는게 아니고 그 나름대로의 앞 날을 내다 본다. 그는 이렇게 물었다.
“최근에 벗꽃을 본 적이 있어?”
“아뇨.”
“그런 거야. 꽃이 떨어진 벚나무는 세상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하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건, 기껏해야 5월까지야. 하지만 그 뒤에도 벚나무는 살아 있어. 저렇게 푸른 나뭇잎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지. 그리고 이제 얼마 후엔 단풍이 들꺼야.”
“단풍이요?”
“그래 다들 벚나무도 단풍이 든다는 걸 모르고 있어. 엷은 노란 색, 빨간 색갈로 들지. 이제 우린 그런 단풍이 되어서 다시 만난 거야”
소설 속의 ‘아름다운 벚꽃 이메지’라고 하면 나는 단연 최인호씨의 것을 들고 싶다. 제목은 잊었지만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벚꽃 만발한 길로 단정한 신사복의 중년 남자가 걸어 오고 있었다. 암(癌)으로 죽은 아내의 화장(火葬) 상자를 절에 모셔 놓고 나오는 길이다. 산들바람에도 벚꽃잎들이 하얗게 떨어져 그의 검은 신사복 어깨에 내려 앉는다. 남편을 이승에 남겨두고 차마 저승길로 발이 떨어지지 않는 아내의 눈물인양 소리없이 쉬임없이 하얗게 그의 위에 떨어지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버스 정거장에 도착했고 버스를 탔고 서울역 앞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정처없이 걸었다. 어느덧 신세계백화점 앞에 온 그는 태평로 쪽 신호등 앞 보도에 섰다. 신호를 기다리며 무심코 앞을 바라 본 순간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진편 쪽 군중 속에 죽은 아내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그건 아니다. 불에 태워 절에 남기고 온 아내의 그 누런 얼굴이 아니고, 오래 전 연애하던 때의 그 얼굴, 앳되고 보송보송한 그 모습이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바로 그 얼굴이었다. 그 녀는 이런 그의 시선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누굴 찾는듯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파란 불이 켜지고 군중들이 마주 움직일 때 그는 꼼짝않고 서 있다가 몸을 돌려 그 녀를 멀찌감치 따라가기 시작했다. 꿈길을 걷듯, 뭉게구름 위를 걷듯 그렇게 그 녀를 좆고 있었다. 물밀듯 행복의 나른함이 그를 감쌌다. 얼마만에 느끼는 달콤한 감정인가? 그 녀가 남대문 시장 앞에 도달했을때 그는 또 한번 놀라야 했다. 물고기처럼 날렵하게 사람들 사이를 헤엄치듯 걸어가던 그 녀. 어느 행인의 바지 뒷 주머니로 손이 번개같이 가더니 지갑을 빼 자기 주머니에 넣는다. 전광석화같은 그 솜씨에 그는 눈이 휘둥그레진채 장승처럼 서 버렸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따라가는 그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스친다. 이제 스토커(미행자)로 오해받지 않고도 말을 걸 수 있는 꺼리가 생긴 것이다. 빠른 걸음으로 그는 그 녀에 접근해 갔다.
소설은 이렇게 벚꽃핀 산사길에서 시작되어 신세계백화점 앞으로 다시 남대문시장 입구로 이어진다. 한번 잡으면 끝 페이지를 넘길때까지 손을 못 놓게 하는 작가 최인호씨를 나는 좋아한다. 요즘 암으로 손가락에 골무를 끼고 글을 쓰고 계시다는 소식에 마음이 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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