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홍택
재밋는 서두를 들라면 은희경작가의 <새의 선물>도 잊혀지지 않는다. 소설은 다짜고짜 <나는 쥐를 보고 있다.>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된다. 유럽풍의 한 고급 레스토랑 창가 테이블에서 주인공 처녀는 멋진 청년 실업가와 와인을 곁들인 스테이크 요리를 앞에 놓고 있었다. 고기 한 조각을 입에 넣고 막 입술 사이에서 포크를 빼내면서 무심코 창밖을 내다 보았다. 그 녀의 시선 속으로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쥐가 들어왔다..뭉클뭉클 살이 찐 이 잿빛 쥐는 쉴새없이 이빨을 갉작거리다가 우연히 이 여인과 눈이 마주 친 것이다.<… 쥐가 짧은 다리를 뻗어 옆 가지로 옮겨앉자 꼬리가 긴 곡선을 그으며 잽싸게 따라가 숨는다. 꼬리. 나는 저 꼬리를 어린시절 변소에 쪼그려 앉아서 내려다보곤 했다. 나무발판 밑의 구덩이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져 아래를 내려다보면 거기 똥 위에 쥐가 있었다. …그 쥐는 마치 흙손으로 개어놓은 시멘트 반죽처럼 제법 뚜들꾸들한 똥 위에 가볍게 올라앉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누렇게 삭아버린 종이쪽과 불다 만 고무 풍선 같은 허연 콘돔 사이를 헤치며 그때마다 꼬리가 유연한 곡선으로 쥐의 행로를 뒤쫒았고 쪼그리고 앉은 채 나는 다리가 저릴 때까지 그 꼬리의 향방을 뒤쫒는 데 열중하였다….>
장장 387페이지가 되는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 쥐의 꼬리는 주인공 여인을 60년대 어린 시절로 되돌려 보내기도 하며 과거와 현실을 연결시켜준다. 6-70년대 한국에서 살았던 나에게 이 소설은 너무 재미있었고 또 많은 것을 일깨워 주었다. 힘들게 살아왔던 그 시절이 정말은 가장 복된 기간이었다. 우리는 가난했지만 모두 못 살았기에 그게 힘든건지 불행한건지 알지 못했고 나를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이 살아 있었기에 나는 그저 행복했을께다. 단지 그걸 느끼지 못했었을뿐.
반 고흐.
<반 고흐 그림전시회(Van Gogh Up-Close)>가 필라 미술관에서 5월 6일까지 열리고 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그의 그림 중 정물화와 풍경화 40점을 모아 전시하고 있다.
반 고흐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눈시울이 축축해 진다. 그의 그림 속에는 순수한 영혼의 절규가 있고 소설같은 이야기가 있고 장중한 음악이 연상되기도 한단다.
반 고흐의 일생은 소설 바로 그것이다.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결정짓는 첫 사건도 봄 어느날에 일어났다. 네델랜드 시골 마을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난 반 고흐는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일곱살에 접어든 1840년 봄. 아버지의 교회 앞 마당에서 동네 친구들과 함께 놀고 있던 반 고흐에게 한 친구가 달려왔다. “저기 네 묘비석이 있어.””그게 무슨 소리야.”그 친구를 따라 모두 우르르 교회 묘지로 뛰어갔다. 한 구석에 조그만 비석이 서 있는데 정말로 거기
라고 새겨져 있었다. “어, 생일도 나와 꼭 같네.” 한가지 다른 것은 나은 해가 일년 먼저라는 것이다. 즉시 그는 아버지에게 달려가 물었다. 아버지는 그 죽은 아이가 진짜 Vincent Van Gogh 그의 맏 아들이었는데 사산(死産)을 했다고 말해 주었다. 결혼 후 첫 아이였기에 기대가 남달랐었다. 옛말에 부모가 돌아가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한다. 다음 해에 낳은 아이가 또 사내였고 해산일마저도 똑 같은 3월 30일이었다. 그래서 아예 첫 아들의 이름인“Vincent Van Gogh”로 이 두번 째 아이를 호적했다는 얘기였다. 부모 입장에서야 첫 아이를 못잊어 같은 이름을 지었겠지만 어린 반 고흐에게는 그 사실을 안 때부터 마음에 혼란이 생겼다. “그럼 난 누구야? 죽은 형이 살아난게 나야? 아님 내가 나야?” 매주 교회에 출석해야 하는 고흐는 교회 묘지를 지날때 마다 이런 혼란을 느껴야 했다. 장성해서 한 때 불교에 심취한 적이있는데, 아마도 불교의 환생원리를 좀더 알고자 해서 그랬을 거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의 곁에 있으려는 그의 의지는 점차 강해졌고 그림 속에 녹아져 있다. 많은 풍경화 속, 저 멀리 소실점 끝에 보일듯 말듯 교회를 그려넣곤 했다.
고흐의 그림은 정말 독특하다. 그림의 초보자조차에게도 그의 그림은 금방 식별된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갈등이, 형Van Gogh보다 좀더 나은 자기여야 한다는 마음 속 경쟁심이 그림을 그렇게 그리게 했나보다.
역사에 남는 산책자가 있다. 영국의 프르스트라는 시인은 산책을 하다가 숲 속에서 두 갈래의 길에 서서, 어느 길로 갈까 망설인다.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가지 않기로 한 길을 바라다볼 수 있는데까지 멀리 바라다 보았다. 그 시의 마지막 구절을 옮기며 이 글산책도 끝내려 한다.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나는 한숨을 지으며 이야기하겠지요.
“두 갈래 길이 숲 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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