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경
언젠가 <크리스찬 헤럴드> 지를 읽다가 내가 존경하는 어느 목사님이 쓴
<돌아갈 내 고향>이란 글을 발견했다. 마음이 쏠리는 제목이어서 단숨에 읽고 난 나는, 나도 돌아갈 내 고향이 있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삼다도라는 제주도는 원래가 화산으로 형성된 섬이라 돌이 많다.
밭 경계선도 돌담이요, 집 울타리도 돌담이요, 해안선도 돌담, 가도 가도 돌담의 연속이다.
그 돌담들을 따라 10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바닷가 마을, 그날도 매일처럼 커다란 해가 서쪽 바다 수평선 속으로 반쯤이나 잠겼는데, 마치 환상의 세계가 그려진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온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자그마한 항구를 둔 입구에는 두껑이와 개똥이라는 별명이 아직도 애용되는 청년 둘이 또순이라는 할아버지 옆에 앉아 장기를 두고 있다.
두껑이라는 이름은 솥두껑처럼 모질게 굴어도 잘 견디어 내라고 지은 이름이고,
개똥이라는 이름은 개똥처럼 쓸모 없는 아이라고 붙여야 ‘염라대왕’이 질투하지 않고 뺏아가지 않는다고 지어준 이름이다. 또순 할아버지는 해가 지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일기예보를 잘하기로 유명하다. 기다란 담뱃대를 돌담 위에 탁탁 치고 기침을 쾅 한 다음, “두껑아, 오늘 밤 날씨가 좋겠는데, 네가 망을 좀 보아라”고 지시를 한다.
고기배 10여 척을 닻 놓아 둔 돌담 부두 옆에는 밀물이 들어와야 가슴 깊이 밖에 안 되는 얕은 해변가를 돌담으로 에워싼 ‘원담’이라고 하는 ‘전통어장’이 있다. 이 ‘원담’ 어장에서는 낙지도 잡히고 소라도 잡힌다.
삼다도라 바람도 많은데, 또순이 할아버지의 예보에 의하면, 이날 밤 바람이 없다는 것이다. 필경 멜치 떼가 밀물을 따라 몰려 오리라는 것을 직감하고 두껑이에게 망을 보게 한 것이다.
해가 지면 등잔불을 켜서 엄마가 바느질하는 옆에 앉아 괜히 투정을 해보다가 잠에 떨어지곤 한다. 천상 어머님이 들어다가 이불 속에 눞혀 주게 마련이다. 밤이 얼마나 깊었을까, 첫닭이 울기 전에 두껑이가 아우성을 치며 지나간다. “멜들어수다, 멜들어수다 [멸치가 들어왔습니다]…” 꽹과리를 치면서 동네를 한 바퀴 돈다.
밀물을 타고 몰려 왔던 멜치 떼가 임시어장 돌담 안으로 들어왔다가 썰물이 나가는 것도 모르고 그만 ‘원담’안에 갇히고 만 것이다. 물이 점점 갈아앉아 가면서 어장 면적이 점점 좁아진다. 멜치 떼는 점점 밀집되어서 파닥 파닥 꼬리치는 소리가 더욱 요란해진다. 달빛에 어장은 은빛으로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바지 옷을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 들어서면 맨손으로도 멜치가 수십 마리씩 잡혀 올라온다.
개똥이도 두껑이도 또 또순이 할아버지도 멜채(멸치잡는 작은 그물)를 들고 들어선다.
아니, 온 동네가 발칵 뒤집힌 것이다. 모두가 멜치를 떠내느라고 아우성이다. 집집마다 멜치를 한 구덕(바구니)씩 잡고 돌아간다.
아침이 되자 이 집 저 집 ‘멜쿡’을 끓이느라고 어머니들이 바쁘다. 초겨울인데도 뒷마당 돌담 옆에는 동지가 선 배추가 아직도 싱싱하게 살아 있다. 부드러운 이파리로만 골라 국에 넣고 끓인다. 이렇게 특별한 음식이 생기면 어머님께서는 으레 히 손자도 없이 홀로 살고 있는 이웃집 노인 할머니를 잊지 않으신다. 큰 대접에 멜쿡을 가득 담아 들고 갖다 드리고 나서야 나는 나의 조반을 먹는다.
몸이 한동안 아파서 가을 추수가 끝난 다음 제대로 움직여 다니지 못한 쇠똥이 엄마는 간밤에 멜치를 잡으러 가지도 못한 모양이다. 밤새 소란하더니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시치미를 떼고 물어가며 대문 안으로 들어 오는 것을, 어머니는 만면 희색으로 맞아 들인다. 쇠똥이 엄마를 밥상 곁으로 붙들어 앉히고 어머니는 식사를 같이 하라고 권하신다. “심어 봅서게!” 수저를 잡아보라는 제주 말이다. 서너 번“심어 봅서게!”를 되풀이 한 다음에야 쇠똥이 엄마는 못이기는 척하고 수저를 드는 것이었다.
이날은 판포 마을에 멜쿡을 못 먹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
필자 소개: 김치경 교수는 한국 제주도 판포리에서 태어 낳지만 한림이 고향이다. 1968년에 미국으로 건너와서 1989에 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31년 간하시고 1993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에는 메인 주립 대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7년간 하시다가 지금은 은퇴하여 필라델피아 근교 “Voorhees” 이라는 마을에서 살고 있다. 현재도 인터넷에서 과학 수학교육 방법을 강의하고 있다. 그리고, 금-토요일에는 남부뉴저지 한국 학교 교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멜쿡=멸치국; 제주도 토속 음식 중 하나로 칼치국에 버금가는 것이다. 싱싱한 갖 잡아온 멸치를 펑퍼진 배추 이파리를 가득 넣고 국을 끓인다. 거기에다 매운 풋고추를 길게 4등분 칼집을 내어서 매콤한 맛을 우려 내어서 먹으면 일미다.
*며루치는 멸치를 햇볕에 말린 것을 통칭한다.
이 글은 1985년 뉴욕한국 일보사 발행 “한국인” (통권 32호, pp. 39-40) 에 발표 출판된 것이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