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이가 뒷마당 나가는 문을 활짝 제치며 “ 밤새 쑥 자란놈이 싱싱하게도 생겼네” 하며 생오이 하나를 내민다. 아직 더위가 몰려 오기전 마당에 앉아 어그적 한입 깨무는 소리에 이른 아침녘이 기지개를 켠다. 씻기도 미안해서 그냥 입에 넣은 연두색 오이. 감칠 맛이야.
문득 어렸을적 기억들이 솟아 오름은 잊고 살아온 날들의 보상처럼 연거푸 머리와 마음에 잔 물결 치듯 적셔온다. 초겨울이 다가오면 엄마와 함께 용산 청과 시장에 김장배추 사러 가는 길을 따라 나선다. 다 흥정을 하시고 리어카에 실린 배추 아저씨를 따라 배추 나부라기들 깔린 젖은 길을 신발 적셔가며 차가운 날을 헤치며 집까지 먼길을 걷는다.
왜 그리 싫었던지. 여름 방학땐 효자동 전차역에서 내려 세검정 시골길을 한없이 걸어 큰아버지댁 장미원에 이르러 방학숙제를 풀어 놓기 무섭게 개울에 발가벗고 몸을 던진다. 찬 물에 소름이 온 몸에 돋아도 나오기만 하면 땡볓에 까맣게 익어가는 동생과 나. 군것질로 주시는 오이 한쪽을 고추장에 살짝 찍어 먹고 된장찌개 하나에 거친 보리밥 한 공기로 저녁을 마치면 다음날 잡으러 갈 매미, 잠자리 생각으로 단잠을 보챈다. 도
대체 방학하면서 숙제는 왜 주는건지…
소독차가 큰 하얀 연기를 내며 동네 구석구석을 돌면 딱지치기하던 동무들 큰 구경거리 나서 그 고약한 소독약 마시면서 꼬리처럼 달려 가고, 눈이 오는 날엔 대나무 스키랍시고 들고나와 연탄재 뿌린 비탈길을 신나게 달려 본다. 온 얼굴에 허연 버짐과 콧물이 범벅이 돼도 우린 달린다. 아토피란 우리 사전에 없었지.
삼각형 비닐 안에 들은 오렌지 주스를 옷핀으로 뚫어 마시고 나무도마 위의 해삼도 초고추장 묻혀 옷핀으로 찍어 먹는다. 초콜릿이란 초를 녹여 만든 것처럼 니끼해도 고급이요 뻔데기는 신문지에 담겨 있어야 제격이다. 비록 불량식품이라 해도 우리의 뱃속은 늘 튼튼했었지.
잠깐이지만 누이의 정성으로 키운 오이 한쪽이 엄마, 아버지와 형제들과 동무들, 모든 함께한 인연들의 기억으로 맞은 훌륭한 아침 식사였다. 습관처럼 따라놓은 커피잔 옆으로 내 60여년 조각들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이 감칠맛을 언제나 다시 맛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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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범성/ 사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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