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려서부터 어렴풋이 어른이 되면‘ 남자답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자답게 사는 게 어떤 건지 기준도 모르고 막연히 생각만 한건 아니다.
개인 주택에 살았지만 정원이 없는 건물이 다닥다닥 붙은 도시 번화가에 살다보니 이웃집 앞뒤 좌우에서 벌어지는 일상을 보기 싫어도 볼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란 탓인지 난 이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즉‘, 나 답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던 것이다.
6.25 동란, 1.4 후퇴 그리고 9.28수복을 거치며 겪은 당시의 어쩔 수 없는 시대상으로만 돌리기에는 지금도 몸서리 쳐지는 상황이었다. 술에 중독이 될 정도로 매일 취기에 젖어 집안사람들을 들볶는 주정뱅이들을 볼 때마다 저래서는 안 된다고 마음을 먹었다.
자식은 줄줄이 달려있는 집 가장이라는 위인이 주야장천 도박에 미쳐 가산을 탕진하고 가정을 돌보지않는 파렴치한들도 나로 하여금 이날 이때까지 도박장은 물론 카시노
출입을 꺼리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평생을 클래식만 고집하고 고전음악만 감상하던 내가 언젠가부터 우리 가요에 매료된 건 칠순이 가까워지면서 부터였다. 평생 펜대만 잡고 입만 놀리는 직업에 종사해온 내가 밭농사로 하루 5시간 이상을 보내는 일상으로 변한 나를 보는 주위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어찌 아무개가 상상도 불허했던 농사에 전념하다니 믿을 수가 없다는 눈치다.
흘러간 유행가를 듣다가는 손끝을 놀려 베토벤의 9번 교향곡 4악장을 감상하며 세월아 네월아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는 생활을 즐겼다. 친구들이 하나, 둘 곁을 떠나가기 시작했고 언젠가부터는 전화도 끊어지기 시작했다. 집사람이 아침 출근을 하고 나면 온 종일 난 늘 혼자였고 나 혼자서 늘 홀로 지냈다.
주치의였던 친구 왈 일생동안 즐기던 운동도 중단하고 사람도 안 만나고 노인회도 안 나가고 이러면 문제가 생긴다고 걱정을 했다. 그런데 그건 날 모르고 하는 얘기였다. 그러고 보니 난 평생을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있으면서도 늘 ‘나 홀로’인 생활을 즐긴 생을 보낸 것이었다.
정신건강학적으로 정상이 아닐 수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난 한 번도 고독감이나 외롭다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다. 아니 혼자 있는 게 좋았고 행복했다. 마냥 많은 생각에 잠기고 상념에 빠져 무언가를 도출하는 걸 즐겼다. 그렇게, 나답게 사는 삶을 산지도 어느 덧 칠십여 성상을 보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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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원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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