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마트 재활용품 회수기 등장
▶ 고장 잦지만 고가 수리비 방치
▶ 최고의 장비는 ‘실천하는 사람’
달리기를 시작하려는 당신.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장비를 산다. 도심을 벗어나 자연 속으로 캠핑을 떠나려는 당신.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집을 통째로 옮겨놓은 듯) 장비를 산다.
‘○○은 장비발’, ‘실력이 안 되면 장비로’라는 말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장비의 사전적 의미가 ‘갖추어 차림. 혹은 그 장치와 설비’인 만큼 장비는 어떤 일의 과정을 쉽게 하고 성과를 높이는 데 꼭 필요하다.
문제는 과유불급. 입문자가 프로 선수나 쓸 법한 장비로 무장하거나 그마저 작심삼일로 끝나 집안 한편에 전시해놓다 슬그머니 중고장터에 올라오는 일이 적잖다. 이렇다 보니 적절한 장비의 중요성을 일컫기보다 주객이 전도된 우리의 소비문화를 조롱하는 의미로 더 많이 쓰이게 되었다.
그런데 요즘 기후행동에도 이 ‘장비발’ 병이 슬금슬금 옮겨가고 있는 듯하다. 대표적인 것이 요즘 주민센터와 대형마트 등에서 눈에 많이 띄는 ‘AI(혹은 스마트) 재활용품 무인 회수기’이다. 페트병, 캔, 종이팩 등 재활용품을 종류별로 선별, 수거할 뿐 아니라 사용자도 인식해 투입한 재활용품만큼 포인트나 현금을 지급하는 장비이다. 인센티브가 주어지고 24시간 이용할 수 있어 주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꽤 높다고 하고, 담당 인력의 일을 덜어주니 행정에서도 반길 만한 첨단 도우미이다. 기술도 점점 발달해 캔과 페트병 등을 자동 압축하고 관련 앱을 깔면 인근의 회수기 위치와 잔여 용량을 확인할 수 있도록 사용성도 좋아지고 있단다. 최근 국내에서만도 생산기업과 제품 모델이 10개 가까이 되고, 도입하는 지방자치단체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역시 ‘장비발’의 숨은 뜻처럼 성급하게 고가의 장비만 갖추면 이후의 일은 자동 해결될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탓에 그로 인한 문제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무인 회수기 한 대 가격은 대략 2,000만 원 내외다.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인데 지자체마다 적게는 서너 대 많게는 몇십 대의 무인 회수기를 구입해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아직 성숙기에 접어든 장비가 아닌 만큼 잦은 고장과 오류뿐 아니라 1대당 연간 200만~300만 원의 유지 보수 비용이 계속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일부 지자체는 유지 보수 예산을 책정하지 않아 설치한 지 얼마 안 돼 무용지물로 방치되어 있거나, 어떤 곳은 심지어 몇십 대의 무인 회수기가 다른 기업의 제품으로 전량 교체되기도 했다.
얼마 전 한 농촌 지역의 자원순환 운동을 하는 활동가가 마을 분리배출 업무 담당자의 인건비가 월 30만 원에서 70만 원으로 올랐다며 제 일처럼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렇게 되기까지 3년이 걸렸단다. AI라는 최신 트렌드의 수식어가 붙었지만 아직 제 역할을 하기에는 미숙한 고가의 재활용품 무인 회수기와 재활용품을 수거하기 위해 마을을 집집마다 돌며 자연스레 마을 어르신 안부도 챙기는 마을 담당자 이야기를 들으며 씁쓸한 기분과 함께 새삼 확신하게 됐다. 기후행동에서 진정한 장비발이 발휘되려면 결국은 ‘실천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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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희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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