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성된 연꽃동김치
십여 년 전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버스를 타고 오랜 시간을 걸어, 무엇이든 다 팔 것만 같은 압도적인 크기의 마트에 도착했다. 무더위를 뚫고 시원한 마트 안에 들어서자마자 들뜬 마음으로 식재료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울상이 되었다. 아무리 찾아도 필요한 식재료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업원을 붙잡고 물어보기도 하고, 가지런히 정리된 야채칸 이름표를 샅샅이 뒤졌지만 배추, 대파, 그리고 콩나물을 찾을 순 없었다. 그날 내 손에 들려 나온 식재료는 세라노 고추(Serrano Pepper)라 불리는 매운 고추뿐이었다. 느끼한 음식에 속이 물릴 때마다 한국에서 챙겨 온 라면에 그 고추를 팍팍 넣어서 끓여 먹었다. 매운맛에 눈물이 찔끔 날 때면 내가 지금 매워서 우는 건지, 서러워서 우는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이후 한인 커뮤니티와 인연이 닿으면서 사정이 좀 나아졌다. 한인 커뮤니티 안에서 만난 선배 이주 여성들에게서 여러 가지 요리 노하우를 전수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배추, 대파, 콩나물 등을 대체할 수 있는 식재료를 알게 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배추대신 청경채 (Bok choy)를, 대파대신 릭 (Leek)을, 그리고 콩나물대신 숙주나물 (Mung bean sprout)을 구해 아쉬움을 달랬다. 이런 경험들이 쌓여 요리를 할 때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식재료로 쉽게 만드는 레시피’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그런 면에서 김진경 셰프는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레시피’를 꾸준히 개발해 온 선구자이다. 쉬운 레시피 개발을 위해 현지 식재료 구입처 조사부터 대체 식재료 연구까지 공을 들여왔다. 먼저 구매하여 직접 써보고 그중 좋은 것을 알려주는 그녀의 추천 목록은 항시 업데이트 중이다. 한 가지를 부탁해도 열 가지를 내어 놓는 김진경 셰프의 남다른 셈법은 그녀가 소개한 ‘연꽃동김치’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의 음식을 내더라도 열 가지의 마음을 품을 수 있는 음식, 그리고 그 음식을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배웠기 때문이다.
■연꽃동김치라는 이름이 참 예뻐요. 어떤 음식인가요?
▲“20대 때 요리 학원에서 배웠던 음식이에요. 이름에 연꽃이 들어가지만 실제로 연꽃으로 만들진 않아요. 갖은 속재료를 무쌈에 싸서 김치 국물에 동동 띄운 음식이랍니다. 마치 그 무쌈의 동동 뜬 모양이 연꽃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에요. 멀리서 오신 분들께 색다르고 고급스러운 음식을 소개하고 싶어 준비했어요.”
■만들기 쉽나요?
▲“그럼요. 현지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들로 간단하게 만들 수 있어요. 이 연꽃동김치에는 원래 오미자 우린 물을 쓰는데 오늘은 맑은 물을 사용해 만들거예요. 타지에서 오미자를 구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원래는 물김치 국물을 낼 때 면보에 각종 재료를 넣어 오랫동안 우린 물을 쓰는데, 그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다진 재료를 직접 넣는 방법으로 대체해서 김치 국물을 만들려고 해요.”
■듣기만 해도 쉽게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셰프님은 평소에 어떤 마음으로 요리하시나요?
▲“(단체 급식을 할 때) 내 가족이 먹는다는 마음으로 요리해요. 내 가족에게 내놓을 수 없는 음식은 절대 내놓지 않는 것이 제 철칙이에요.”
김진경 셰프는 그 누구보다 오랜 시간 배움에 투자해 왔다. 따라서 전통요리 조리법에 익숙하고 그 전통을 지켜가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곧 그는 전통을 이어나가는 것과 더불어 한국을 떠나 타지에서 한국의 맛을 그리워하는 이웃들을 위해 변주된 레시피를 개발하기로 결심했다. 정성과 사랑이 담긴 집밥의 레시피를 누구나 경험해 볼 수 있도록 말이다.
이 결심은 우리에게 익숙한 가성비의 정의를 다시 살펴보게 한다. 오늘날의 세상은 효율과 단가를 계산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특정 대상에게만 적용이 가능한 가성비를 추정한다. 그러나 김진경 셰프의 가성비는 ‘받은 것보다 더 많이 내어주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 하나의 음식을 내놓으면서도 열을 헤아리는 계산법, 이 셈법의 기본이 김진경 셰프의 변주된 요리에 살아 숨쉰다.

속재료를 넣은 절인 무쌈을 김치 국물에 넣는 순간
실리콘밸리에 터전을 잡은 한국 테크기업의 총괄 셰프를 맡기까지, 김진경 셰프에게는 우여곡절이 참 많았다. 그 덕에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는 많은 것들에 흔들리지 않게 되었고, 절대 변치 않는 것은 자신의 실력임을 일찍 깨달았다고 한다. 없는 것에 아쉬움이 없고, 얻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은 그렇게 자라온 것이다.
김진경 셰프는 인터뷰 중, ‘자신은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무언가를 시도하면 의도한 것보다 좋은 결과를 내는 일들이 많았었고, 그렇게 이어진 일련의 결과들이 자신을 오늘날로 이끈 것 같다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는 말의 무게를 김진경 셰프를 통해 실감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값진 경험으로 승화시키는 태도와, 기회가 찾아왔을 때 물러서지 않고 도전하는 태도가 그를 단단히 준비시켰고,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녀는 이미 그 누구보다 준비된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피어나는 이야기와 함께 연꽃동김치도 피어났다. 김진경 셰프의 시범을 본 뒤, 인터뷰에 참가한 촬영팀 모두 함께 무쌈을 만들었다. 절인 무 위에 일정한 길이와 간격으로 단정하게 썬 야채를 올리고 돌돌 말아 미나리 줄기로 감싸 묶었다. 내가 처음 만든 무쌈은 모양이 엉성했다. 채 썬 배와 홍고추, 오이와 노랑 빨강 피망을 넣고 돌돌 마는 과정에서 탄력을 잃었던 것이다. 그런데 두 번째 세 번째 무쌈은 점점 꼴을 갖춰 나갔다. 무쌈에 넣을 속재료를 적당히 넣는 것이 얼마만큼인지, 또 미나리 줄기로 무쌈을 묶을 때 얼마나 잡아당겨야 적당한 탄력이 생기는지 경험치가 쌓였기 때문이다.
예쁘게 피어나는 연꽃동김치를 보며 이 레시피야말로 십여 년 전의 나에게 보내주고 싶은 레시피라고 생각했다. 미국에 처음 와서 언어와 문화의 차이로 단념하거나 포기하는 일이 잦았고 매운 라면을 먹으며 눈시울을 적시던 어린 나에게 말이다. 이 연꽃동김치 한입을 먹어 볼 수 있었다면 그 서러웠던 마음이 조금은 위로받았을 듯싶다.

연꽃동김치 속재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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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경 셰프의 요리 레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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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연꽃동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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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물: 무 ½ 개, 미나리 한 줌(묶는 용도), 배 ½ 개, 홍고추 ½ 개, 오이 ½ 개, 노랑 피망 ¼ 개, 붉은 피망 ¼ 개
김치 국물 준비물: 물 7컵, 소금 1.5 큰술, 다진 마늘 1 큰술, 생강즙 1 큰술, 매실청 ½ 컵, 설탕 2 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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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드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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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는 얇게 직사각형으로 썰고, 미나리는 적당한 길이로 준비한다.
무와 미나리를 절임용 소금물(소금 2 큰술, 물 1리터)에 약 15분간 절인다.
배, 홍고추, 오이, 노랑 피망, 붉은 피망은 모두 성냥개비 크기로 곱게 썬다.
절인 미나리는 물기를 꼭 짜둔다.
절인 무 위에 2의 재료를 올려 돌돌 말아 연꽃 모양을 만들고, 미나리로 묶는다.
김치 국물 재료를 모두 섞어 국물을 만든 뒤, 연꽃 모양으로 묶은 무쌈을 넣어 동동 띄워 완성한다.
참고: 맑은 물 대신 오미자 우려낸 물 7컵을 사용하면 연꽃을 닮은 은은하고 아름다운 색의 김치를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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