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안보 전략의 최우선 순위는 본토 방어다. 이를 위해 그린란드를 포함한 서반구 전역에 대한 통제를 강조한다. 서반구 다음으로 중요한 지역은 인도·태평양이다. 미국은 인도·태평양을 세계 경제와 안보의 핵심축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자국의 장기적 번영이 이 지역의 안정에 달려 있다고 평가한다. 따라서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는 것이 핵심 과제 중 하나다. 트럼프 행정부는 여전히 ‘힘을 통한 평화’ 원칙으로 중국을 억제하려 하지만 구현하려는 평화의 성격이 다소 모호해졌다.
최근 방한한 엘브리지 콜비 국방부(전쟁부) 차관은 연설에서 미국은 중국을 굴욕 시키거나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함께 번영할 수 있는 질서를 원한다고 강조했다. 이것이 바로 미국이 추구하는 ‘품격 있는 평화(decent peace)’라는 것이다. 여기서 ‘decent’라는 표현은 번역이 쉽지 않은데, 경쟁 관계에 있더라도 극단적 대립은 피할 수 있는 나름 ‘괜찮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콜비 차관은 이러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호적인 힘의 균형(favorable balance of power)’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도 했다.
‘힘의 균형’은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 개념이다. 콜비 차관이 논하는 ‘우호적 힘의 균형’ 확보는 사실상 미국에 유리한 현재의 세력 분포를 유지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반면 중국은 이러한 균형을 자국의 전략적 공간을 제약하는 ‘비우호적 힘의 균형’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중국은 남중국해와 동중국해에서 배타적 영향력을 확보하려 하고 있고, 대만해협 장악에 나서고 있는데 이는 자국에 유리한 힘의 균형을 만들어 내려는 시도다. 미국이 원하는 ‘품격 있는 평화’는 중국의 시각에서는 ‘굴욕적 평화’다.
따라서 중국의 ‘현상변경(revisionism)’ 시도는 계속될 수밖에 없으며, 이를 저지하기 위해 콜비 차관은 ‘거부 억제(deterrence by denial)’ 전략을 제시했다. 이론적으로 ‘보복(punishment)’과 ‘거부’는 무 자르듯 나뉘는 배타적 개념이 아니며, 실제 억제력은 그 둘의 상호작용에서 나온다. 그럼에도 보복 억제가 “나를 건드리면 끝까지 응징하겠다”는 공세적 성격이 강하다면, 거부 억제는 “네가 여기 오는 것만 막겠다”며 선을 긋는 소극적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원래 ‘거부’는 지난 20년간 중국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자유로운 군사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공들여 온 ‘반접근/지역거부(A2/AD)’ 전략의 핵심이다. 이를 위해 중국은 장거리 정밀타격 미사일 등 비대칭 전력 강화에 매진해 왔다. 하지만 최근 5년 동안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해군력의 비약적 성장과 원양작전 능력 확보를 바탕으로 이제는 공세적인 해양 진출을 꾀하고 있다. 과거 중국의 전략이었던 ‘거부’를 이제 미국이 채택해야 하는 상황이니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거부 전략(The Strategy of Denial)’의 저자이기도 한 콜비 차관이 이 개념을 선호하는 배경은 이해되지만 이를 굳이 국방전략의 핵심 근간으로 명문화할 필요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남는다.
미국은 거부 억제에서도 한국이 더 큰 역할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국 역시 미국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현상유지’를 희망하는 국가이니 중국의 팽창을 저지하는 데 일정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미국은 무엇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미국은 한반도 안보를 한국에 떠맡기고 얻는 ‘전략적 자율성’을 거부 억제에 어떻게 활용하겠다는 것일까. 최근 발표된 두 전략서, NSS와 NDS를 보면 미국이 거부 억제에 어떤 의지와 역량을 투입할 것인지에 관한 내용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시대착오적인 트럼프의 ‘황금함대(Golden Fleet)’ 계획이 중국의 해양 팽창을 거부할 수 있다는 주장은 그야말로 소도 웃을 일이다. 결국 거부 억제에서도 미국은 뒷줄로 물러나고, 한국을 앞줄로 떠미는 형국이 아닌지 우려스럽다.
트럼프 1기만 하더라도 미국은 중동과 유럽에서 이란과 러시아 견제의 임무를 동맹국에 위임하는 ‘역외균형(offshore balancing)’ 전략을 구사했다. 그러나 인도·태평양만큼은 동맹의 역할을 중시하면서도 미국이 직접 앞장서겠다는 ‘역내균형(onshore balancing)’ 의지가 뚜렷했다. 그런데 이제는 인도·태평양 지역에서도 역외균형 전략으로 선회하려는 의도가 감지된다.
트럼프 행정부의 NSS와 NDS가 한국에 던지는 메시지는 비교적 선명하다. “우리는 우리 집을 지킬 테니, 너희 집은 이제부터 너희가 지켜라.” “더 나아가 너희 동네까지도 너희가 지켜라.” 미국은 한국을 모범동맹이라고 치켜세웠지만 정작 그 모범동맹의 자리를 지키는 일은 점점 더 버거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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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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