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보니 밤새 내린 눈으로 세상이 온통 은빛으로 물들어 있다. 순백으로 물든 그 아름다운 길을 걷고 싶어 두터운 외투를 걸치고 바깥으로 나갔다. 잿빛 하늘에서는 아직도 굵다란 눈송이들이 대지를 향해 쏟아지고,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흰 눈이 신발에 묻어나는 소리가 뽀드득 뽀드득 들려온다.
가끔씩 나뭇가지 위에 쌓여 있던 눈의 편린들이 목덜미 속으로 들어가 몸을 움츠리게 만들기도 하지만 마음은 그저 즐겁고 조금은 들뜨기까지 한다.
키가 몹시 큰 전나무, 이국의 정취를 간직한 히말라야 삼나무, 우아한 멋스러움이 배어있는 소나무 가지에는 설탕을 녹여 붙여 놓은 듯 흰 눈이 소담스레 덮여있고, 서로 이어진 키 작은 관목들은 사이사이에 육각형의 하얀 별들을 가득 매단 채 순백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고 있다.
눈길을 걷노라니 정세문 선생님이 곡을 만들고 이원수 선생님이 노랫말을 쓴 겨울나무의 한 소절이 떠오르며 이 노래와 함께 춥고 긴 겨울밤을 수놓던 메밀묵과 찹쌀떡 장수의 구성진 메아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또한, 어두운 골목길에 울려 퍼지던 야경꾼의 둔탁한 딱따기 소리와, 외할머니께서 어머니와 밤이 새도록 함께 두드리시던 리드미컬한 다듬이 방망이 소리도 사뭇 그리워진다.
아울러 해마다 겨울이면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 주시던 살얼음 섞인 수정과의 매콤하면서도 시원한 감칠맛도 새삼스레 떠오르고, 웃풍을 막기 위해 창문에 쳐놓은 두꺼운 국방색 군용담요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주위를 맴돌던 황소바람도 목 언저리에 와 닿는 것 같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온몸을 시리게 만들었던 차가운 옥양목 이부자리,
불을 끄기가 무섭게 천장에서 벌어지곤 했던 서생원들의 100 미터 달리기 경주,
교실마다 바깥으로 길게 뽑아 올린 동그란 연통에서 차가운 겨울하늘로 피어오르던 조개탄 지피는 노오란 빛 매캐한 연기,
아침조회가 끝난 후 교실로 뛰어 들어와 난로 가까이 언 발을 갖다 대자마자 구멍이 나버렸던 나일론 양말,
추위가 다가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마루 바닥 위에 방석을 여러 개 깔아 놓고 매일같이 스케이트 타는 연습을 해보던 국민학교 4학년 겨울방학,
한 폭의 멋진 동양화를 연상시키듯 하얀 눈 펄펄 날리던 강화도 송해면의 논둑길,
두 줄로 선 나무에 예쁘게 피어있었던 설악동입구의 하얀 눈꽃과 눈덮인 얼음장 밑을 힘차게 흐르던 맑은 시냇물,
끊임없이 쏟아져도 쌓이지 않고 바다 속으로 침잠해버렸던 덕적도 앞바다의 함박눈,
의정부 근처 산장으로 동계수련회를 갔을 때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을 바라보며 붉게 타는 장작난로 곁에 둘러 앉아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던 그 밤,
눈이 무척 많이 내렸던 어느 해 겨울저녁, 파아란 수은등 불빛이 쏟아지는 덕수궁 앞길에서 곤색 코트에 연분홍빛 머플러를 두른 여학생 서너 명이 웃음 가득한 귀여운 몸짓으로 옥신각신 서로를 밀고 당기며 미끄러운 눈길을 넘어질 듯 넘어질 듯 위태롭게 걸어가던 모습에 이르기까지,
흩날리는 눈발 속에 모두가 한데 어우러져 아련한 겨울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눈은 아직도 그치지 않고 소복소복 계속해서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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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일청/미주크리스찬문인협회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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