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스, 험퍼딩크 앨범출반으로 명매니저 화제
"스타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수많은 사람들속에서 스타의 잠재력을 볼 수 있는 날카로운 눈에 띄어야 스타는 비로소 탄생하는 것이다.
아놀드 조지 돌시와 토머스 존스 우드워드는 고든 밀스의 눈이 없었더라면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졌을 것이다.
밀스를 만나면서 두 무명가수는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변신했다. 돌시와 우드워드는 60년대 세계 팝계를 풍미한 가수로 이들의 예명은 바로 톰 존스, 잉글버트 험퍼딩크다.
영국 웨일즈출신의 밀스는 60년대초 원래 자신이 팝스타를 꿈꿨지만 다른 사람의 스타자질을 발견하는데 더 큰 소질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1964년 웨일즈의 한 술집에서 우연히 ‘토미 스캇 앤 더 세내터스’라는 그룹의 공연을 목격한 것이 팝스타로의 전환점이 됐다.
리드 싱어의 독특한 카리스마와 폭발적인 가창력에 매료된 밀스는 그에게 접근, 솔로로 전향할 것을 권했다.
스타 만들기에는 이미지구축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간파한 밀스는 토머스 존스 우드워드에게 보다 특징있는 예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대단한 흥행을 구가하던 영화 ‘톰 존스’에 착상한 밀스는 우드워드에게 라스트 네임을 생략하고 대신 퍼스트와 미들 네임만을 쓰도록 했다. 그리고 존스 최초의 히트 싱글 ‘It`s Not Unusual’을 공동작곡했다.
존스를 수퍼스타로 만든 밀스는 또 다른 젊은 스타재목 돌시를 발견했다.
밀스는 돌시에게도 새로운 이름을 주었다. 이번에는 독일의 오페라 작곡가 ‘잉글버트 험퍼딩크’를 땄다.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한 우렁찬 음량과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상시키는 히프흔들기가 트레이드마크였던 역동적인 존스와는 대조적으로 험퍼딩크는 부드럽고 극도로 낭만적인 발라드 가수였다.
읊조리는 듯한 험퍼딩크의 스타일은 컨트리 음악에 안성마춤이었다. 그는 1967년 미국에서 ‘Release Me’라는 옛 컨트리 히트등을 불러 톱텐진입에 성공했다.
존스와 험퍼딩크에게 턱시도를 입혀 주류 음악계를 공략한 밀스는 두 사람을 라스베가스쇼에도 진출시켰다. 마케팅전략은 그대로 적중, 존스와 험퍼딩크는 금새 라스베가스 밤무대를 석권했다.
당시 존스와 험퍼딩크 팝음악 톱 20 가운데 열일곱 곡을 휩쓸었다. 또한 밀스는 두 사람이 각각 자신의 TV 뮤직 버라이어티 쇼를 출범시키도록 도왔다.
영국의 두 무명가수를 60년대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스타로 다시 태어나게 한 밀스는 지난 1986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최근 다시 출반된 존스와 험퍼딩크의 앨범은 다음과 같다.
’베스트 오브 톰 존스: 밀레니엄 컬렉션(폴리돌 레코드)’-’What`s New Pussycat’, ‘Delilah’등 그의 히트곡이 대부분 수록돼 있다. 섹시 이미지를 탈피, 다른 장르의 음악에 도전했다면 훨씬 더 위대한 가수가 될 수 있었을텐데하는 아쉬움이 남을 정도로 보컬의 무한한 잠재력을 느낄 수 있다. 컨트리 음악의 클래식으로 불리우는 ‘Green Green Grass of Home’에서 이같은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잉글버트 험퍼딩크의 얼티미트 컬렉션’(힙오 레코드)-’There Goes My Everything’, ‘Am I That Easy to Forget’등 올드팬들의 향수를 자극할 대표적인 히트곡들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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