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이 만주에서 빨치산 생활을 시작한 것은 18살 때인 1930년부터다. 본명 김성주를 김일성으로 바꾼 것도 이 때다. 웨이정민이 지휘하는 중국인 유격부대에 들어가 게릴라 전술을 배운 그는 ‘이이제이’, ‘원교근공’ 같은 외교의 기초도 이 때 익힌 것 같다. 1941년 이 유격대가 일본 토벌군에 의해 궤멸되자 그는 소련으로 도주한다. 중국과 소련을 넘나드는 그의 줄타기 외교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중국과 소련의 틈바구니에서 실리를 챙기는 그의 외교술이 톡톡히 재미를 본 것은 60년대 중소분쟁이 악화하면서부터다. 다른 공산국가가 누가 진정한 공산주의 종주국인가를 놓고 벌이는 다툼에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김일성은 두 나라와 모두 국경을 접하고 있어 자칫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질’수도 있는 불리한 상황을 지렛대로 이용, 한번은 이쪽에 붙었다 다음에는 저쪽에 붙는 식으로 오히려 양쪽으로부터 이익을 챙겼다.
아버지 김일성 무릎 밑에서 배운 탓인지 김정일의 외교술도 상당한 수준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워싱턴의 북한 문제 전문가들은 행정부 안팎, 보수 온건파를 막론하고 북한의 외교 능력에 대해서는 의외로 후한 점수를 준다. 중도 온건파적 입장에 있는 브루킹스의 북한 분석가는 “귀하게 자라 버릇이 없고 냉혹할 지는 모르지만 유능한 인물”이라고 김정일을 평했으며 보수 성향의 헤리티지의 한 관계자도 “북한은 강대국간의 권력 게임에 익숙한 상태며 똘똘한 외교를 펴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이 북한을 ‘깡패국가’로 분류해 놓고는 있으나 그 외교 역량에 관한 한은 상당한 점수를 준다는 게 한 행정부 관계자의 말이다. 갑자기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엄포를 놓다가는 다음 날은 천연덕스럽게 협상창구로 나오는 등 변칙적이고 비이성적 행동을 일삼는 듯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여기에도 나름대로 계산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경제도 엉망이고 군사력도 미국과는 비교가 안되면서 핵 카드 하나로 이만큼 양보를 받아 내면서 체제를 존속시켜 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막판에 무산되기는 했으나 클린턴이 평양을 방문하기 직전까지 간 것도 그 만큼 미국이 북한을 인정해 주고 있다는 증거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미국과 북한은 13일 부시 행정부 출범후 첫 공식 접촉을 시작했다. 북한이 이번에는 어떤 수법으로 미국으로부터 양보를 얻어 낼 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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