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망대
▶ 신기욱 <스탠포드대 교수, 사회학/국제학>
스탠포드에 연수 온 한 중견 언론인의 이야기다. 9월 11일 이후 미국에서 전개된 일련의 상황을 보면서 두 가지 점을 느꼈다고 한다. 우선 한국 같으면 희생자 가족들이 울부짖는 모습이 매일 TV 화면에 나갔을 만한데 미국에선 그런 모습을 보기가 어려웠다는 점이고, 둘째는 한국 같으면 중앙정보부(CIA)나 연방수사국(FBI)의 책임자들이 곧 바로 해임되었을 텐데 아직도 엄연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공감이 가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차이가 어디서 오느냐에 있는데 정부에 대한 신뢰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즉 미국인들은 정부나 사회제도에 대해 최소한의 신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책임추궁이나 비난보다는 일이 수습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반면, 한국인들은 정치지도자들이나 사회제도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없으므로 울분을 토할 수 있는 분출구와 희생양을 찾게 된다는 말이다.
사실 9월 11일 이후 미국 정부나 미국인들의 태도를 보면 놀라우리만큼 감정보다는 이성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물론 테러집단에 대한 피의 보복을 주장하거나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노력도 만만치 않지만, 적어도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계 미국인을 캠프에 넣었던 미국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은 지금 상당한 심리적 피로감에 빠져들고 있다. 비행기를 탈 때면 승객들의 얼굴에서 솟아 나오는 긴장감을 느낄 수 있고, 탑승구로 가는 길에 중무장한 방위군을 보면서 한국의 유신시절을 연상하게 되는 것은 나만의 경험이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탄저가루를 통한 테러 가능성에 우편물을 열기가 겁나고, 러시아워 시간에 금문교를 폭파하겠다는 위협에 주지사가 나서야 하는 현실은 미국이 얼마나 막대한 사회 심리적 비용을 치르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베트남전이나 걸프전 당시에도 없었던 새로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은 그동안 수많은 전쟁을 했지만 지금처럼 시민들의 일상생활이 위협받은 적은 없었다. 지금 미국은 전후방이 따로 없는 전혀 새로운 전쟁을 하고 있다. 테러집단의 공격 대상은 전쟁터에 한정된 것이 아니고 세계 곳곳에 있는 미국시민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급작스레 맞고 있는 미국인들의 심리적 긴장과 피로감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부시 정부가 안고 있는 가장 큰 숙제는 이러한 시민들의 피로감을 어떻게 풀어주느냐 하는데 있다. 전쟁이 길어지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테러의 위협으로 긴장이 고조되면 사회적 피로감은 쌓이게 마련이다. 이에 따라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감을 줄어들게 되고, 불신의 증가는 새로운 사회불안 요소가 될 수 있다.
흔히들 미국사회는 신용사회라고 한다. 이는 미국사회의 구성원리가 신뢰에 기초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데 지금 시민들이 겪고 있는 심리적 피로감은 이러한 사회적 신뢰를 뿌리로부터 흔들 수 있다. 이번 테러로 인해 미국이 치르는 가장 큰 대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 테러문제는 빈 라덴을 처벌하거나 탈레반 정권을 해체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외교정책의 재검토가 필요하며 이에는 전향적인 중동정책 특히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에 그 핵심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시민들의 심리적 피로감이 사회적 만성질환이 되기 전에 일을 마무리할 수 있는 정치적 리더십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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