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동해안의 바닷가에서 자랐다. 그래서 바다에서 붉은 해가 떠오르는 것을 항상 바라볼 수 있었다. 십 수년 전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베이지역에서만 살아왔기에 더 이상 떠오르는 해를 보지 못했다. 바다를 좋아하기 때문에 자주 바다를 보러 가지만 늘 지는 해만 볼뿐이다. 지는 해에는 편안한 슬픔이 있다. 슬픈 아름다움이 있다. 할 일을 다 하고 나서 더 이상 쫓길 것이 없는 사람들이 가지는 편안함이 있다. 자신의 전부를 던져 최선을 다하는 존재들이 지니는 찬란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러다가 단숨에 푹 수평선 밑으로 꺼져 버리는 모습에는 모든 사라지는 것들이 지니는 슬픔이 있다. 십 년이 넘게 그렇게 지는 해를 보고 또 보다가 어느 날, 내 안에서 어떤 강렬한 욕망이 치밀고 올라왔다. 솟는 해를 보고 싶다는 갈구였다. 태평양의 안개처럼 내 몸 안에 스물스물 기어 들어와 쌓여있을, 소멸하는 것에 길들여진 타성을 일시에 몰아내 버릴만한 생명력으
로 솟구치는 해를 보고 싶었다. 꼭 봐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야만 내 생명의 균형이 잡힐 것 같았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박 두진의 시를 읽으면서 솟는 해를 그리워 하다가 마침내 한국을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한국 방문중의 내 일정에는 당연히 해돋이를 보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뜬다는 장기 호미곷을 찾아갔다. 하지만 겨울철의 바다안개 때문에 떠오르는 해는 보이지 않았다. 행여나 하는 미련으로 바다와 하늘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가 수평선에서는 한참이나 떨어진 공중에서 아무런 감동 없이 해가 그 밋밋한 얼굴을 내 밀었을 때는 차라리 화가 났다. 다음에는 모래시계로 유명해진 정동진으로 갔다. 바닷가 근처의 모텔에서 밤을 지내고 새벽에 일어나니 아뿔사 이번에는 안개정도가 아니라 아예 비가 오고 있었다. 그래도 해변으로 나갔다.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을 이고 비에 젖은 채 아침은 오고 있었다. 새벽도 없이, 솟는 해도 없이 아침만 온 것 같아서 억울했다. 해돋이의 한을 풀기 위한 나의 여정은 제주도로 이어졌다. 새벽 일찍이 일어나 성산포의 일출봉을 올랐다. 계단이 가파르고 높았다. 혹시나 해가 미리 솟아버리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으로 걸음을 빨리 했다. 숨이 턱에 차 올랐다. 일출봉 위에서 막힘 없는 남 동향의 바다를 향해 섰다. 바람이 새 찼다. 추웠다. 그러나 솟는 해의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십분, 이십 분, 삼십 분. . . 해는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떠올랐지만 볼 수가 없었다. 역시 겨울의 안개 때문이었다. 긴 여정에도 불구하고, 조국 땅에서 해돋이로 유명한 세 군데를 다 찾아 다녔지만, 나는 끝내 솟는 해를 보지 못했다.
솟는 해에 대한 한은 그 때로부터 이태가 더 지나고 나서 뜻밖에도 작년의 동남아 선교여행에서 풀렸다. 캄보디아와 미얀마에서의 선교일정을 다 마치고 나서 태국에 살고있는 옛 교우를 방문했다가 후하힌(Hua Hin)이란 해변가에서 하루를 머물 수 있는 여유를 가졌다. 골든샌드 호텔 18층의 높은 곳에 자리한 내 방은 아무 것도 막힘이 없는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었다. 새벽 세시쯤 되었을까? 난데없는 빛줄기에 놀라 잠을 깼다. 아! 멀리 수평선에서 번갯불이 뻔쩍이고 있었다. 밤바다가 온통 빛으로 가득 찼다가 다시 어두워지고 하는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잠이 다 달아나 버린 채 경외감에 가슴 떨며 하늘과 바다 사이에서 번개와 천둥이 만들어 내는 신묘한 빛과 어둠의 조화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러기를 약 한 삼십 분. 밤바다가 조용해지고 나서야 나도 가슴을 잠잠히 가라앉히고 다시 잠들 수 있었다. 그러나 불과 두 시간 후에 다시 깨어야 했다. 이번에는 그 막힘 없는 수평선에서 이글거리는 붉은 불덩어리가 불쑥 솟아올랐다. 아아! 해가 솟고 있었다. 몇 해 동안 그토록 보고 싶었던 솟는 해를 볼 수가 있었다. 남중국해의 한 모퉁이, 태국의 동쪽바다에서 마침내 떠오르는 해를 본 것이다.
일몰이 그러하듯 일출도 잠시이다. 일단 수평선과의 경계만 벗어나면 해는 금새 공중에 걸린다. 솟아오르는 불덩어리의 감격은 그만큼 짧다. 그 다음은 그냥 여전한 태양이다. 심호흡으로 해를 맞이하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제 이 한번의 해돋이로 앞으로 십 년 정도는 너끈히 캘리포니아의 서부해안에서 지는 해를 편안함으로 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삶의 대부분은 해가 뜨고 지는 순간이 아닌, 공중에 걸려있는 동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던가. 만약에 해가 지구에 생명에너지를 보태주고 있다면 그것도 떠오르고 지는 짧은 순간이 아니라 마냥 공중에 걸려있는 동안일 것이다. 그렇다면 평범한 일상은 감동적인 몇 순간들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 사치스러웠던 일출의 바람기를 잠재우고 돌아온 후 나는 훨씬 편한 마음으로 샌프란시스코의 오션비치를 산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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