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의 창]
▶ 이인희 (Caregiver)
이십여년전 바람이 몹씨불던 오월의 어느날 가족들과 친지들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김포공항을 떠나 기대와 설레임으로 장미빛 신혼생활을 꿈꾸며 미국땅을 처음 밟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결혼이라는 새로운 생활과 언어와 풍속이 다른 생고한
환경에의 적응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도 없지않아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 라는 노래처럼 낭만의 도시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남자 선을 본지 몇번만에 그의 착하고 순수한 눈빛에 끌려 전격적으로 결혼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내가 한국에서 쌓았던 경력, 학벌, 친구, 가족 등 소중한 자산들을 뒤로하고 한남자만을 바라보며 태평양을 건넜다. 그날, 언제나 꿋꿋하시고 의연하셨던 어머니께서는 나를 보내고 돌아오면서 참았던 눈물을 떠뜨리며 통곡을 하셨다고 한다.
다섯자식중 하나쯤은 외국에 나가서 살아도 괜찮다고하시며 세계화를 부르짖으셨던 어머니께서 나를 떠나보낸후 그리움에 사무쳐 시름시름 앓으셨다. 젊은시절 이북에서 남쪽에서 공부하셨던 아버지를 만나러 삼팔선을 넘나들며 겪었던 아슬아슬한 무용담, 피난때 겪었던 고생들을 들려주시며 자식들에게 재산보다 신앙을 유산으로 남겨주려고 애쓰셨던 어머니다.
한번은 내가 대학시절에 유신체제에 항거하여 대강당에서 국가를위한 기도회에 참석한적이 있었다. 경찰에 포위되어 나갈 수도 없었던 우리는 꼬박밤을 지새우고 이튿날 아침에야 집에갈 수 있었다.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어머니께 꾸지람들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등을 두드리며 정의를위해 분연히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한다며 나에게 올바른 시민정신과 정의감을 심어 주셨다. 결혼초기에 너무나 판이한 생활방식으로 남편과 사소한 일로 소모전이 벌어질 때마다 하소연하면 나의 멘토였던 어머니께서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놀라운 해결책이 있단다 기도하며 네가 먼저 변화하도록 하라고 일러 주시곤 하셨다. 두번의 강산이 변하는 동안 나와 달랐던 남편의 것들이 내안의 나의 것들로 자리잡게 되었다. 십년전 미국오시기로 예정한
날을 불과 며칠앞두고 갑자기 천국으로 가신 어머니를 추모하러 한국에 나갔을 때 어머니방에 놓여있던 선물꾸러미들을 보았다. 아픈몸을 이끌고 쇼핑다니며 딸을 위해 준비한 사랑의 꾸러미들!
그사랑을 부여안고 통곡했다. 어머니! 나의 영원한 노스탤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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