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주부 신드롬
어제 저녁 오랜만에 비빔밥을 했다. 콩나물, 시금치나물, 가지나물, 호박나물, 오이볶음, 버섯볶음, 불고기 다진 것을 예쁘게 돌려 담고, 계란 후라이를 얹어 양념고추장과 함께 식탁에 올렸더니 감격한 남편과 아들은 세수대야처럼 큰 대접에 썩썩 비벼 게눈 감추듯 먹어치운다.
그렇게 손가는 음식을 어떻게 했느냐고? 잘난 체 하지 말라고?
고백하자면 그중 3개 나물은 마켓 반찬부에서 사온 것이다. 콩나물, 시금치나물, 가지나물이 함께 들어있는 반찬 한 팩을 사왔다. 여기에 호박을 썰어 양념해 볶고, 오이와 버섯도 소금, 후추, 마늘 조금씩 넣어가며 볶고, 불고기 양념해 놓은 것을 다져서 볶으니 어렵잖게 훌륭한 비빔밥을 만들 수 있었다.
사실을 말하면 마켓에서 반찬을 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콩자반이니, 무말랭이니, 젓갈류의 밑반찬을 가끔 사긴 했어도 금방 해먹어야 하는 나물같은 반찬을 사다먹는 일은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지난 주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충격적인 장면을 접하게 됐다. 평소 알뜰하고, 음식 잘 하고, 깔끔을 떠는 후배가 마켓에서 사온 바로 그 삼색나물 패키지를 척 내놓는 것이 아닌가.
“아니, 얘, 너 이거 마켓에서 산거니?” “응, 이 집 반찬이 맛도 있고 값도 싸서 가끔 사먹어” “아니, 너 반찬을 사서 먹는단 말이야?” “이런 나물은 손 많이 가잖아. 사다 먹으면 간단하지 뭐” “깨끗하게 씻었는지, 미원 많이 넣었는지, 불안하지도 않아?” “에이, 그런 생각하면 뭘 먹고살아? 식당에서 사먹는건 다 괜찮고? 언니, 좀 편하게 살아라”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렇다. 사먹어도 되는구나. 나는 왜 맨날 집에서 먹는 음식은 반드시 내가 만들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을까. 미원 들어갔을까봐 걱정된다면 우리 어릴 때 먹던 대장균 우글거리던 그 많은 정크푸드는 어떻고... 충격과 함께 반성과 기쁨이 어우러지면서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 흥분마저 들었다.
뭐든지 ‘홈메이드’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강박관념. 나는 이것이 ‘일하는 주부의 죄의식 신드롬‘이라고 생각한다. 직장여성들은 하루종일 밖에 나가 일하기 때문에 가사일을 잘 돌보지 못한다는 열등감과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러다보면 이 한 몸 부서지더라도 식구들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비장한 의무감 같은 것을 갖게 되고, 사다먹거나 가공식품을 조리하면 누가 ‘일하니까 저런다’고 손가락질할까봐 기를 쓰고 직접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가사일만 돌보는 전업주부들이 오히려 밖에서 투고한 음식으로 손쉽게 식탁을 차리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게다가 전업주부들은 평소 식사 준비에 관해 많이 연구하고 주위 친지들과도 정보를 자주 나누기 때문에 간편한 상차림 지혜가 날로 발전하는 반면, 일하는 여성들은 늘 하던 음식을 돌아가며 해대는 것만도 벅차 연구는커녕 날로 퇴보하는 것 같다. 요새는 간편한 냉동식품, 반가공식품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데, 장을 보러가도 ‘뭐 새로 나온게 있나’ 여유있게 돌아보는 사람과 시간에 쫓겨 필요한 것만 찾아 사들고 나오는 사람의 식탁이 같을 리 없지 않은가.
나는 얼마전까지도 다진 마늘을 사다 쓰지 않고 통마늘을 사다 껍질을 불린 후 칼로 벗기고 푸드 프로세서에 갈아 썼다. 생선도 손질해 소금양념된 것들이 있는지도 모르고 생선부에서 통째로 사다가 직접 손질했으며, 마늘빵 같은 것은 버터에 마늘을 갈아넣고 빵에 발라 오븐에 구워냈다. 아마 이런 여자를 네글자로 줄이면 ‘미련한년’이 될 것이다.
아, 이젠 좀 적당히 사먹기도 하면서 밥하는 스트레스 줄이고 편하게 살자. 이것이 새해 나의 주방철학이다. 확실하게 ‘아줌마’로 변모해가는 증세라고나 할까. 울상 짓는 남편의 얼굴이 보이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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