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전쟁이 터지게 된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경제적 요인들을 떠나서 문제를 보다 근본적인 입장에서 관조해 보면 이런 비극이 발생하게 되는 것은 인류가 늘 간직하고 베풀어야 할 사랑과 존중, 이해와 동정을 팽개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모름지기 사랑과 존중, 이해와 동정은 인간성(humanity)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은 물론이고 오늘날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테러, 인권유린, 빈곤, 질병, 환경침해 등 많은 문제의 근본 원인도 인간성의 망각과 상실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9.11테러참사도 그렇거니와 이번 전쟁도 해당 국가들만의 문제가 아니고 전 인류의 문제이다.
9.11테러 이후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외부세력으로부터 자국의 안전과 이해를 보호하고 이를 우선적으로 추진, 도모하는 과정에서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적 경향이 심화되고 이른바 우경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는 오늘을 사는 우리 인류에게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와 다른 사람, 다른 나라, 다른 문화, 다른 생각에 점점 더 비관용적으로 되는 것은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사랑과 존경과 이해와 동정을 저버리는 것이다. 인류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인류의 인류다움을 잃고, 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9.11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다시 인간성의 망각과 상실로 인한 또 다른 참사가 되풀이되고 있는 것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안팎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내 인간성에 반하는 전쟁의 비극을 빚어내고 있는 오늘의 미국을 바라보면서 ‘도대체 이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하는 물음을 생각해 본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대답은 미국은 나라가 아니라 하나의 신념이고 이념이고 이상이고 가치이다. 미국은 사랑과 존중과 이해와 동정을 바탕으로 자유와 정의,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려는 가치관 또는 이상 그 자체라는 말이다.
그런 미국이 최근 안팎에서 많은 비난과 반대에 부딪히고 있다. 그런데 사실 최근 고조되어 온 반미(反美)를 뒤집어 보면 그것은 반드시 미국이 지향하는 가치와 이상에 대한 도전이라기보다 그 가치와 이상을 성취하기 위해 미국이 채택하고 있는 방법론에 대한 저항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의 대외정책이 일방적, 가부장적, 패권주의적으로 수립되고 운용되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미국은 자신의 방법론만이 유일하다거나 또는 최선이라는 오만을 버려야 하고 거기에도 오류와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인식해야 한다.
아울러 미국을 보는 안팎의 시각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최근 한국에서 일고 있는 ‘반미감정’의 경우, 방법론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떠나 종종 분별없는 ‘감정적’ 반대로 이어지고 있기에 걱정된다.
서로 다른 가치관, 다른 이상, 다른 문화, 그리고 다른 방법론을 대하는 자세는 상호 존중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물론 남의 것을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자기 것이 최선인 양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자신과 다른 가치관이나 방법론 중에서도 모두에게 덕이 되고 선이 되는 것을 분별하여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미국이 다시 세계로부터 존경을 회복하는 길이고, 또한 한국의 입장에서도 근거 없는 감정적 반미를 극복하고 지미(知美)를 통하여 이른바 용미(用美)에 이르는 길일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사랑과 존중과 이해와 동정이라는 인간성의 회복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구되는 때라는 것을 전쟁의 포화와 섬광이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장석정 일리노이주립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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