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 대부로 알려진 경원하(75) 박사가 지난 1970년 캐나다에서 월북한 뒤 한때 자신이 거주했던 브라질을 최소한 1차례 방문, 한인들을 대상으로 포섭 활동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브라질 상파울로 거주 한인인구가 50여명에 불과할 당시인 1964년 1월 상파울로로 이민간 연봉원(59, 사진) 변호사에 따르면 경원하 박사는 1965년 6월 수학전공 연구원으로 상파울로 대학에 왔다 1967년 캐나다 맥길 대학 수학 연구원으로 떠났다. 이어 경 박사는 1970년 캐나다에서 북한으로 간 뒤 1973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모습이 변해 상파울로에 다시 나타나 한인들을 놀라게 했다.
연 변호사는 24일 본보와 만나 "경 선생이 상파울로 대학에 연수왔을 당시 한인 인구는 약 5,000명에 불과해 누구집에 수저가 몇 개 있는 것까지 다 알 정도여서 경 선생 월북 소식 등은 한인사회에 널리 퍼졌다"며 "원래 키가 크고 체격이 호리호리한데다 외모에 별 신경을 쓰지 않던 그가 월북 3년 뒤인 1973년 갑자기 살이 찌고 단정한 모습으로 나타나 많은 사람들이 이북에서 상당한 대우를 받고 있구나 짐작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고 말했다.
연 변호사를 비롯한 브라질 한인들에 따르면 상파울로 연수 당시 경 박사는 "한국정부가 지나치게 썩었다. 군 비리가 너무 심하다. 해병 장교로 나라에 충성해 얻은 것은 폐병 뿐이다"고 불평했으나 한인들은 그가 월남한 해병대 장교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사상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경 박사는 캐나다로 공부하러 가 한국에서 온 부인 및 두 딸과 합류, 생활하며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곳에서 친북 인사로 알려진 박모씨의 알선으로 북한에 있는 형을 만났으며 이후 온 가족을 데리고 월북했다. 이보다 3년 뒤 경 박사는 일본 여권을 소지하고 상파울로에 다시 나타나 약 열흘간 머물면서 한인회장을 비롯한 한인사회 인사, 친구 등을 만나 방북을 권유했다.
당시 경 박사는 "수령님의 깊은 배려로 폐병이 완치돼 내 모습이 이렇게 건강하다. 이북은 군수사업이 발달돼 전쟁이 나면 10일내로 이남이 먹힌다" 는 등 북한을 홍보, 포섭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가장 친하게 지냈던 권모씨가 "이제 그만두고 다시 예전처럼 우리와 살자"고 설득하자 "그렇게 하기에는 모든 게 너무 늦었다"고 답변했다. 이어 경 박사는 아르헨티나로 건너가 같은 활동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연 변호사는 경 박사가 미국 국립 로스알라모스 연구소에서 핵폭탄 제조에 참여한 뒤 캐나다로 건너갔다는 보도에 대해 "경 박사가 캐나다 대학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연수하러 가게됐다며 학교에서 보내온 편지를 보여주고 캐나다 영사관에 부탁해달라고 해서 내가 직접 그의 유학 서류 작성을 도와주었다"며 "로스알라모스 연구소에서 실제로 연구했다면 캐나다에 가기 전이 아니라 캐나다 유학 당시 잠시 로스알라모스에 들러 연구하지 않았나 짐작한다"고 말했다.
한편 연 변호사는 브라질에서 가장 유능한 한인 변호사라는 평을 듣다 2000년 미국 변호사 자격을 획득, 맨하탄 브로드웨이 32가에 사무실을 열고 한인은 물론 브라질인 등을 상대로 이민전문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신용일 기자> yishi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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