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는다. 공주로, 왕자로 예쁘게 차려 입은 아이들이 모두 체포됐다. 이제는 준열한 재판이다.
서릿발같은 논고와 함께 왕자와 공주가 하나 둘 끌려나온다. 곧 처형될 순간이다. 그런데 박수가 없다.
반응은 당초 기대와 정반대다. 한 아이가 흐느낀다. 그리고는 호소한다. 저 애들을 살려주세요. 다른 아이들도 같은 반응이다. 결국 관중석은 울음바다가 됐다. 장학관은 사색이 됐고….
스탈린 시대를 배경으로 한 러시아 소설로, 아이들을 상대로 계급투쟁을 선동하는 연극이 실패로 돌아가는 대목이다. 대강의 스토리만 기억난다. 하도 오래 전에 읽어 작가 이름도 가뭇하다.
인터넷에 떠오르는 한국 기사들을 읽는다. 송두율씨 관계 기사가 어지럽게 널려 있다. 그 와중에 한 기사가 눈을 끈다. ‘미국은 싫지만 미국 국적은 좋다’-.
순간 기억이 되살아났다. 작가의 이름조차 생각이 안 날 정도로 깊은 망각 속에 가라앉은 소설인데 바로 이 대목이 갑자기 선명히 떠오른 것이다. 왜.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 기사 내용은 이렇다. ‘한국과 미국의 국적을 가진 이중국적자라면 어떤 국적을 가지겠는가’ 이 질문에 고려대학생(244명 대상 조사)의 44.8%가 미국을 선택하겠다는 응답을 했다는 것이다
반(反)미는 교양필수 과목이다. 속마음이야 어찌됐든 좌우지간 미국을 두들겨 패는 글줄을 써야 대접받는 세상이다.
반(反)미는 패션이다. 반미에 동조하지 않으면 유행에 뒤떨어진 존재다. 그러므로 반미 대열이라면 모름지기 기쓰며 참여해야만 젊은이다.
이게 요즘의 한국형 캠퍼스 컬처라고 하던가. 그런데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학생이 기회가 주어진다면 미국 국적을 택한다는 응답이다.
관련된 한 가지 지적이 재미있다. 공개적으로 질문이 이루어졌으면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까 하는 것이다. 당위론적인 대답만 나왔을 게라는 추측이다. 민족이, 애국이, 반미가 운위되면서.
결론은 익명을 전제로 한 설문조사이므로 이런 응답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나마 본마음을 털어놓았다는 거다.
그건 그런데 왜 엉뚱하게 러시아 소설의 대목이 떠오르는 건가. 글세, 왜 그럴까. ‘송두율’이라는
이름과 함께 뭔가가 집힌다.
그건 이중성이다. 뭐랄까, 한국인 특유의 이중성 같다. 그래서 그 공포시대에도 본마음을 그대로 노출시킨 러시아의 어린이들이 생각난 것인가.
이 역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옥세철 논설실장>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