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한국을 향해 점점 더 커다란 해바라기가 되어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나이가 들어서 일까, 외국생활이 길어지며 고향이 더욱 그리워져서 일까, 아니면 내 시간이 많아져서 일까, 아무튼 한국 것에, 한국 일에 해가 갈수록 관심이 늘고 시간을 많이 쏟게 된다.
먼저 한국 음식은 떠올리기만 해도 절로 행복해지는 수준이 되었다. 기숙사에서 살던 유학 초창기 시절에는 일년에 몇 번 있는 명절이 가정집에 초대받아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한국 음식이란 먹어도 그만, 먹지 않아도 그만 그다지 그리운 음식이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대부분의 식사가 한식이 되었고 횟수가 늘어나면서 당연히 메뉴도 다양해졌다. 게다가 전에는 쳐다보지도 않던 음식들에 이제는 군침까지 흘리곤 한다. 빵이면 최상의 뇌물로 통하던 일명 ‘빵 아줌마’가 밀가루가 내 체질에 맞지 않는다는 건강상의 이유로 한순간에 빵을 멀리하더니 어느새 전엔 장을 볼 때 눈길조차 주지 않던 떡 진열대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떡 아줌마’가 되어버렸다.
음식뿐이 아니다. 한국 드라마를 보는 시간은 어마어마하게 늘어났다. 유학시절엔 팍팍한 학생 살림 때문이기도 했지만 원래 소설이나 드라마 체질이 아니어서 드라마라고는 가끔 유명한 작품 몇 개를 빌려본 게 고작이었다.
그러던 내가 요즘엔 인기 드라마들을 섭렵하다시피 하고 있다. 그것도 거의 실시간으로 말이다. 게다가 인터넷에서 공짜로 볼 수 있는 한 방송국의 드라마들은 이메일을 하거나 뉴스를 읽는 동안 아예 컴퓨터 화면 한쪽에 틀어놓는다. 한마디로 한국 드라마의 생활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15년 전 대단한 화제가 됐던 드라마가 최근 DVD로 출시되었다. 꼭 다시 보겠노라 벼르다가 지난 연휴 모든 일을 뒤로한 채 3일을 몽땅 투자해서야 끝낼 수 있었다. 드라마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꺼번에 볼 경우 쉽게 지루해져서 에피소드를 골라보거나 빨리 돌려 보며 서둘러 끝내 버리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이 36부작의 장편 드라마는 다시 보는 작품임에도 시종일관 나를 긴장시키고 몰입할 수 있게 했다. 일제시대부터 해방, 6.25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종군 위안부, 학도병, 731부대, 생체실험, 마루타, 세균전, 난징 대학살, 제주 4.3항쟁, 빨치산 등 역사의 참담한 소용돌이가 드라마 속에 녹아들어 있었다.
이 격동의 세월에 꼼짝없이 휘말리어 사랑하는 이와 조국이 “버리고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가 없는” 것이 되어버린 주인공들은 “차라리 내가” 죽음의 자리가 될지도 모르는 곳으로 서슴없이 들어선다.
실제 주인공으로 이 세월을 살아내신 우리 부모님,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그 하루하루가 아니 매순간이 어떠했을까 잠시 생각해 본다. 살아남았기에 그 깊이도 무게도 가늠할 수 없는 끔찍한 기억들을 껴않은 채 얼마나 더 힘겨울지 모르는 새로운 시간들을 마주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 드라마를 보며 6.25때 태어난 큰오빠 생일만 되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신 부모님 얘기를 해마다 들어야 했던 기억이 났다. 왜 그렇게 오래토록 감회가 새로우셨는지 조금은 알듯하다.
지금도 지구촌 한쪽에서 전쟁이라는 무서운 일을 감당해야만 하는 사람들 생각이 났다. 이 순간 잠시라도 마음을 다해 그들을 위해 감히 기도해 본다. 역경을 이겨낸 우리 선조들의 고통과 그 정신의 맥이 우리 모두에게 단단하게 따뜻하게 이어져 왔기에 지금의 내가 멀리에서도 우리의 것들을 즐기며 고국을 느끼고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라 믿는다.
눈앞에 고난을 피할 수 없는 그들도 훗날 그 정신이 더욱더 강건한 맥으로 반드시 이어지리라 믿으며 이 믿음이 단 한순간 이나마 아주 작은 위로라도 될 수 있으면 싶다.
김선윤
USC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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