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네티컷 통신(곽건용 통신원)
가랑비가 소리없이 내리는 저녁 1시간을 운전하여 커네티컷 주 비컨 펼스 소재 김정환 박사(예일대 은퇴 신경병리학 교수)의 자택에서 김 박사와 그의 부인을 반갑게 만났다. 김 박사는 자신의 분야인 신경병리의 강의와 끊임없는 연구, 그리고 예일병원에서의 신경조직 진단으로 눈, 코 뜰 사이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요즘 오는 5월 8일에 있을 커네티컷 한국학교의 발전과 운영을 위한 기금모금 음악회 준비로 정신없이 바쁘다고 하면서 미국사회에서 한국학교 운영은 한국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언어 등을 가르치는 것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또한 한국학교 운영은 지역사회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학부모만의 관심을 벗어나 모든 지역사회가 이를 후원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1967년 6월 3년간의 군의관 복무를 마쳤을 때 모교인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조교로 임용할 것을 제의 받았으나 이를 사양하고 미국 유학을 결정한 것은 올바른 판단이었음을 자부하면서 버지니아주 놀퍽에 있는 드플병원에서 수련의를 2년에 마치고 뉴욕에 있는 엘버트 아인슈타인 의과대학에서 4년간에 걸쳐 해부와 임상에 대한 병리학을 연구한 후 오하이오 주립 의과대학에서 교수로 초빙을 받았으나 이를 사양하고 더 공부하고 싶은 야심을 가지고 예일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신경병리학의 연구원으로 허락을 받아 3년간 연구하였다고 한다.
김 박사가 3명의 연구원 중 미국인 1명을 제치고 예일대학교의 교수로 임용된 것은 자신의 생애를 통해 가장 기쁘고 자랑스러운 일이라면서 오하이오 주립 의과대학교에 가지 않은 결정이 그의 생애에서 두 번째 올바른 판단이었다고 하는 그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운 미소로 가득하였다.
뉴욕에 있는 성 누가병원에 간호사로 취직이 되어 1969년에 이민 왔다는 부인 조성혜씨는 친지의 소개로 만난 남편 김정환 박사를 첫 눈에 서로 좋아 하였으나 선친이 한국에서 성결교회 목사로 진혜와 충무 등지에서 목회를 하였으므로 남편이 교회를 출석하지 않는 것이 고민이었었다고 말하면서 싱긋 웃어 보였다.
1970년 결혼하여 무남독녀 김현수씨를 낳았으며 지금은 결혼을 한 후 롱아일랜드에 산다면서 딸이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에야 비로소 간호사로 복직하여 일을 하였으며 그 전에는 집안에 모든 일을 잔디 깎는 것을 비롯하여 부인이 전부 하였다고 하면서 다정한 눈길로 아내를 쳐다 보았다.
지금도 그는 신경병리학의 일로 세계를 순방하면서 회의 및 강의를 하느라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보람있고 자랑스럽다는 생각 때문에 전혀 피곤함을 느끼지 않는다고 하였다.
김 박사는 오늘날 자신의 신경병리에 대한 권위를 당시 학교 당국했던 사실을 설명하며 미국사회의 공정성과 누구든 열심히만 하면 미국은 진정으로 기회의 나라임을 강조했다.
부인 조성혜씨와 함께 한 김정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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