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하씨(75)는 말 그대로 한 길을 꾸준히 걸어온 사람이다. 1976년 워싱턴 메트로 전철이 막 생겨났을 때 입사, 지난 24일 은퇴식을 가졌으니 33년 만이다.
한인들의 미 이민이 전성기를 이루던 70년대. 송씨도 1남 4녀의 아이들을 데리고 부인과 함께 워싱턴으로 왔다. 전기 기술 덕분에 1967년부터 71년까지 월남에 가 패시픽 엔지니어링에서 일하며 경력을 쌓았던 송씨는 그 때의 경험을 계기로 가족들과 73년 12월 미국행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몇 년 간 이러저러한 일을 하던 그에게 큰 기회가 왔다. 이제 막 개통된 메트로 전철은 그의 기술과 경력을 필요로 했다. 응모를 했고 당당히 합격했다. 어쩌면 전쟁 통에서 일하던 상황보다 더 치열하고 긴장된 삶일 수 있는 미국 직장생활. 몇 년 안된 이민 초년생이 뛰어난 기술과 한국인의 성실성 만을 무기로 뛰어들었지만 실력은 금방 드러났다.
“항상 안전이 최우선인 메트로 전철 주차장을 관리하다 보면 자동으로 제어되는 장치들이 고장날 때가 있습니다. 매우 위험한 순간이지요. 이럴 때는 수동으로 빨리 바꾸어 대처해야 하는데 미국 기술자들은 잘 못하더라구요. 영어는 짧았어도 이럴때 솜씨를 보였더니 칭찬이 자자하더군요. 이런 이유들이 70이 넘은 나이까지 일할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닌가 합니다.”
일을 잘못하면 해고도 잦은 직장에서 송씨와 같은 장기근속은 거의 볼 수 없는 사례였다. ‘Power Department’의 ‘High Voltage’ 분야를 관장하는 부서에서 C, B, A, AA로 나눠진 직급의 최고 단계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하지만 테크니션으로서 늘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 3교대로 24시간 대기해야하는 직종인지라 밤일을 할 때는 다른 직장에 대한 유혹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마음을 다잡고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에 더 집중했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송씨의 33년 근무는 아마 메트로 전철 회사 내에서 최고 장기 근무 경력으로 여겨진다. 송씨를 위해 상사와 동료들이 열어준 은퇴식이 그 증거인 셈이다.
그의 수퍼바이저였던 고든씨는 “내가 비록 상급자지만 송씨가 성실하게 트레이닝을 해준 덕분에 직장 생활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1934년 황해도 금천군에서 출생, 부인 송명혜씨와의 사이에 성희, 성은, 랜디, 제니, 토마스 등 1남 4녀를 둔 그는 자식들이 모두 제 밥벌이를 잘하고 있어 감사할 뿐이다. 워싱턴한인세탁협회 회장을 지냈던 김경우씨는 그의 맏사위다.
김경우씨는 “많은 사람들이 뭔가 큰 것을 이뤄보고 싶은 욕망에 붙잡혀 살아가는데 이 분은 한 눈팔지 않고 제 길을 묵묵히 가며 가족 모두에게 행복을 선사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며 “비록 장인이기는 하지만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매우 보람있는 인생이었다”고 스스로도 평가하는 송씨의 장인 정신과 한우물 파는 인생은 한탕주의와 유행을 쫓아 방향을 잃고 뛰어다니는 한인사회에 조용하지만 큰 귀감이 되고 있다.
<이병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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