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해냈다. 동서로 장장 4,350마일의 미국 대륙을 안두식씨와 딸 솔이는 이웃집을 건너가듯 자전거로 가로질러버렸다(본보 8월16일자 A1면 보도). 6월 22일 시애틀에서 태평양을 뒤로 하고 출발해 지난 19일 메릴랜드주 애나폴리스 해변가에서 대서양 바닷물에 발을 담그기까지 두 달이 채 안됐다.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집에 잠시 들러 쉬었던 날들을 빼면 기간은 더 짧다. ‘한국인 부녀의 자전거 미국 횡단’이라는 힘센 장정도 쉽게 해낼 수 없는 대역사를 치러낸 안씨와 솔이(클리블랜드의대·NEOUCOM 재학)는 뭐라 꼬집어 얘기할 수는 없지만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 기분이다.
여행을 끝내자마자 바로 본사를 내방한 두 사람은 전혀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40대 초반에 이민을 와 미국 생활이 7-8년째로 접어든 안씨(50)는 “당시 한국에서 스트레스가 과중했다”고 이민 동기를 설명했다. 스스로를 ‘교육 난민’이라고 농담 섞어 말하는 안씨는 미국에 이민 온 후 집과 일, 그리고 취미로 가끔씩 즐기는 골프 밖에 모르는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딸의 제의로 하게 된 자전거 여행은 일견 단순한 그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 준 일대 모험이었다.
서쪽을 향해 달리는 코스는 맞바람을 맞아야 하기 때문에 반대로 방향을 잡았다. 뒷바람을 타면 훨씬 자전거 타기가 쉽다. 하루에 125마일을 간 적도 있었는데 총 9시간 25분을 탔다. 하루 책임량인 70마일 정도를 가면 피곤해서 조금도 더 가기 싫지만 그날은 뒷바람 덕에 예외였다. 미네소타주를 달리던 어느 날인가는 모텔을 찾기 위해 5마일을 정도를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게 싫어 마을을 빙빙 돌다 주한 미군이었던 마음씨 좋은 주민을 만나 극진한 대접을 받았던 운좋은 경험도 있다.
아찔한 순간도 물론 없지 않았다. 앞서 가던 솔이가 기찻길을 건너야 했다. 마침 기차가 달려오고 있는 상황에서 먼저 건널목을 건너려던 솔이가 자전거 바퀴가 홈에 끼는 바람에 넘어졌다. 이미 위험을 직감하고 건너지 말라고 고함을 치던 안씨가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기차는 경적을 울려댔고 솔이는 일어나서 제 몸 보다 먼저 자전거를 챙기려 했다. 순식간에 기차는 건널목을 통과했고 안씨는 속수무책으로 건너편에서 기다려야 했다.
“뭐 별로 무섭지는 않았어요. 재빨리 자전거 바퀴를 레일 홈에서 꺼냈어요. 급박한 상황이어서 자전거를 옆으로 내동댕이치기는 했지만...” 당시를 회상하는 솔이의 표정은 당시 아빠의 애간장이 어떻게 탔는지 모르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이었다.
공연히 텃세를 부리는 주민들도 가끔 있었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기대 이상으로 친절했다. 다른 자전거족들을 하루에 두 세 번 만나는 기쁨도 컸다. 또 지도, 샤워시설, 민박 등 자전거족들을 위한 정보와 시스템이 워낙 잘돼 있어 아주 요긴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warmshowers.org’ 등 여러 정보 사이트를 활용하면서 큰 도움을 얻었다.
광활한 대륙을 달리며 이들이 본 것은 뭘까? “대답이 쉽지 않군요” “옥수수를 정말 많이 봤어요.”
솔직히 말하면 대자연의 경이가 솔이의 눈에는 잘 들어오지 않을 때가 많았다. 대신 생각을 많이 했단다. 안씨도 큰 산을 네 다섯 시간에 걸쳐 오를 때 “언덕을 넘어서면 뭘 먹을까 하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심오한 철학 보다는 피곤함과 배고픔이라는 감각적인 욕구에 지배될 때가 더 많았다는 말이다. 또 다툼은 얼마나 잦았는지. 솔이는 “2년 치를 두 달 동안 다 해치운 것 같다”고 말했다.
“고루한 한국 아버지와 자전거 여행을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웠겠어요. 이해합니다. 그러나 늘 제가 해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을 배려하라는 것이죠. 사실 그것 때문에 잔소리를 많이 했어요. 먼저 인생을 살아가는 어른이 진심으로 해주는 충고입니다. 그리고 자전거를 탈 때 느꼈듯이 인생의 대부분은 지루함의 연속이라는 것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솔이가 나중에 의사가 돼서도 이런 자세로 남에게 봉사하며 살았으면 합니다.”
권위주의적이라는 핀잔을 또 한 번 들을 각오를 하고 던지는 안씨의 말이었다.
<이병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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