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적인 라인의 턱시도 재킷이 여성의 실루엣에 맞춰 슬림하게 다시 태어났다. 턱시도 재킷하면 오피스 룩이나 예의 갖추는 자리에 어울리는 아이템이라 생각하지만 의외로 캐주얼 룩에도 잘 어울린다. 길이가 짧은 재킷이라면 잔잔한 프린트가 있는 시폰 소재의 원피스를 매치해 발랄하고 캐주얼하게 연출하고 엉덩이를 덮는 기장의 재킷은 이번 시즌 컬렉션의 모델처럼 루스한 티셔츠에 스키니 진이나 레깅스를 매치해 시크하게 연출해도 좋다.”
윗글은 어느 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잡지의 ‘패션’란에서 인용한 것이다. 누가 보아도 예사로운 우리글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필자는 한국에서 대학을 다녔고 미국 생활도 수십년 되었으나 한글과 영어로 뒤범벅인 이 글을 보고 이해도 잘 안 될 뿐더러 그런 내가 혹시 시대에 뒤떨어진 것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갖게 한다.
돌이켜 볼 때 한국에서 꽤 오랜 기간 동안 소위 지성인들이 쓴 글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가 있었다. ‘이데올로기’라는 단어이다. 우리말에 ‘이념’ 또는‘ 사상’이라는 좋은 말이 있지만 그들은 굳이 ‘이데올로기’(Ideology의 독일식 발음)라는 말을 쓰기 좋아하였다. 아마 그 용어를 쓰면 글이 더 고상한 느낌을 준다는 생각에서 그런 것 아닌가 추측해 본다.
그런데 요사이는 그 말을 신문이나 잡지에서 찾아보기 어렵고 방송에서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 대신 최근에는 ‘패러다임”이란 말이 유행이다. 지식층에 있는 인사들뿐 아니라 너도나도 이 단어를 자주 쓴다.
얼마 전 한국의 어느 고등학교 국어 교사가 신문에 기고한 글을 보니 ‘패러다임’이란 말이 다섯 번이나 들어 있었다. 정작 미국에서는 듣기 힘든 말인데 오히려 한국에서 더 애용한다. 의도하는 글의 내용에 따라 ‘본보기’ ‘관념’ ‘공감대’ ‘의식구조’ ‘인식’ ‘기준’과 같은 다양한 말로 얼마든지 표현이 가능한데도 말이다.
문제는 이러한 외래어(영어)를 사용하는 의도가 그에 해당하는 우리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말이 더 고급스럽고 시대에 앞서 나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런 풍조가 결국 현대판 사대주의는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말과 글은 그 민족의 뿌리이고 정체성의 표현이며 고유한 정서와 문화의 산물이다. 이것을 지키는 것은 국민적 자긍심이며 주체성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엄연히 우리 것이 있는데도 외국 것을 빌린다면 스스로 그 선호하는 국가에 예속됨을 자원하는 태도가 아닐까.
1990년대 불어 닥친 한국의 세계화 물결이 뜨거운 영어공부 열기로 비약되었고 이런 풍조는 나아가서 영어 잘하는 것이 자신을 격상시키고 타인과 경쟁에서 승리하는데 중요한 수단이 된다는 고정 관념이 어느덧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린 듯하다.
하기야 싫든 좋든 영어가 국제어 노릇을 하는 세상이니 기왕이면 열심히 공부하여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인구가 많아지는 것이 국가적으로도 유익할 수 있다. 다만 그 대가가 국민의 모국어 경시 풍조까지 몰고 온다면 (서두에 인용한 예문처럼) 이것은 분명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단언 하건데 아무리 시대가 변하여도 우리는 지켜야할 기본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필자는 한마디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싶다. “영어는 유창하게 한국어는 순수하게.” 한글을 만드신 세종대왕의 깊은 뜻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조정훈/건축가 ·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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