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요나라에 허유(許由)라는 의인이 있었다. 은퇴를 앞둔 임금이 산골에 숨어 사는 그를 찾아와 천하를 맡아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귀가 더러워졌다며 강에 가서 귀를 씻었다. 소부라는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 말을 듣고는 강 위쪽으로 올라가 망아지에게 물을 먹였다. 허유의 귀를 씻은 더러운 물은 망아지에게도 먹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태평성세 요나라의 왕이 돼달라는 꿈같은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한 허유의 거짓말 같은 얘기는 ‘허유세이(許由洗耳)’라는 고사성어를 남겼다. 상나라의 백이(伯夷)? 숙제(叔齊) 형제도 비슷했다. 상나라를 정복한 주 무왕으로부터 벼슬을 제의받자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먹고 살다가 그 고사리조차 주나라 것이라는 핀잔을 듣고는 굶어죽었다.
현대 한국에도 벼슬을 돌같이 여긴 선비가 하나 있었다. 지난 6월 별세한 김준엽 전 고려대총장이다. 그는 1988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국무총리 영입 제의를 거절했고, 그 전에도 5? 16 군사혁명 직후 김종필로부터 공화당 사무총장으로, 1974년엔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통일원장관 제의를 받았지만 모두 고사하고 교육자의 길을 지켰다.
허유와 백이숙제와 김준엽은 특별한 예외일 뿐 벼슬을 탐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있어온 세태이다. 특히 한국인들의 벼슬 집착은 유난스럽다. 조상시절부터 벼슬을 해서 국가의 녹을 먹는 것이 출세의 표징이었다. 얼마 전까지도 지방도시에선 새파랗게 젊은 검사가 나이 든 유지들로부터 ‘영감’이라는 존칭을 들었다.
출세는 한국인들에게는 일종의 한(恨)이다. 오랜 세월 벼슬이 출세의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한정된 ‘감투’를 놓고 피나게 경쟁한다. 벼슬을 해야 가문이 빛난다는 강박관념이 사회에 팽배해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자조적인 말도 있다. 자녀들의 과외열풍이 망국병인 줄 알면서도 척결하지 못하는 부모들의 심리엔 출세의 한이 깔려 있다.
한인들도 이민 올 때 그 한을 태평양에 버리지 못한 모양이다. 벼슬욕심이 본국사람들 못지않게 많다. 1세 이민자의 여건상 주류사회 벼슬은 언감생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인사회에 단체들이 수없이 만들어지고 단체장 벼슬이 양산된다. 단체장이 못 된 사람들은 사장 칭호를 듣는다. 종업원 한명 없는 자영업자들도 그렇게 불리기 일쑤다.
지나친 감투욕 때문에 단체가 갈라서기도 하고 소송에 휩쓸리기도 한다. 당사자들은 대의명분을 내세우지만 국외자들에겐 감투싸움으로 보일 뿐이다. LA 한인회는 선거잡음 끝에 두명의 회장이 생겼다. 미주 한인총연합회도 최근 회장선거를 둘러싸고 법정공방을 벌였고, 뉴욕에서는 교회협의회 회장선거가 법정으로 가기 직전 겨우 마무리됐다.
워싱턴주의 양대 도시인 시애틀과 타코마도 지금 한인회장 선거홍역을 동시에 치르고 있다. 후보들간의 이전투구가 아니라 후보와 선거관리위원회의 알력이어서 이채롭다. 통상 단독후보의 추대 모양새였던 회장선거에 올해는 양쪽 모두 복수후보가 몰렸다. 본국정부의 해외동포 참정권 부여에 따라 ‘한인회장 벼슬’도 격상된 것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출세는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유명해지는 것을 뜻한다. 개인적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이 꼭 출세는 아니다. 출세의 진정한 의미는 “오래동안 준비한 사람이 세상의 부름을 받고 나와서 만인을 위해 ‘봉사의 길’ 들어서는 것”이다. 한인회장은 봉사직이므로 한인회장이 되는 것은 곧 출세이다. 봉사의 길에 얼마나 충실하냐가 문제다.
출세욕 자체는 나쁘지 않고 오히려 자신과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능력도 없이 봉사의 길이 아닌 개인의 명예와 부귀영달의 길을 추구하며 벼슬을 탐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이율곡은 경고했다. 감투 좋아하는 사람들이 귀담아 들어야할 경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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