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국 사회 태동기에 서자로서 근대화에 앞장섰던 실학자“
오늘날은 평등을 부르짖고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되는 실력본위 시대에 살고 있다. 민주주의란 기치아래 인권의 존엄성이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시대다. 그러나 우리 고국 역사를 보면 봉건주의가 팽배해서 사람을 차별하고 서자로 태어나면 아무리 재능이 많아도 벼슬에 나가지 못하는 시절이 있었다. 그러한 시절에 봉건적 질곡 아래 서울에 가난한 집안에서자로태어나 사회의 냉대속에서도 활달한 성격과 탁월한 재능을 지닌 “박제가”(1750-1805)를 소개한다. 그는 인복이 많아 19세 때 박지윈(1737-1805)에게서 실학을 배우면서 시문,글씨, 그림에 뛰어나 가정적으로는 불우하였지만 인복이 많아서 학문적 동지들과 함께 북학파라는 새로운 학풍을 지닌 학파로서 부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이덕무, 유득공,이서구와 함께 시문 4대가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1776년 그와 세 사람이 펴낸 ‘건연립’이라는 시집은 청나라에까지 소개될 정도로 훌륭한문장 이었다. 29세 때인 1778년(정조2)에 정조의 특명으로 가고 싶어 하던 중국으로 가게되어 3개월을 여행 하면서 새학문을 배우고 돌아와 생활의 개선과 사회 제도의 모순점에 개혁방안 등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복학의’를 저술 하였다. 20년 뒤(1798) 경기도 현령을 거쳐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임명되어 생애를 거기서 보내게 되었다. 그는 3차례나 중국 연경을 왕래 하면서 청의 학자나 문인과 교류하였다. 그가 주장하는 북학은 이론이나 수양이 아니라 주로 경제 생활의 개량에 있어 청나라의 기술을 도입하자는 이론이었고, ‘경제란 우물과 같아서 이를 줄곧 이용하지 않으면 말라 버리게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놀고 먹는 양반 사상의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양반도 농사짓고 상업에 종사하여양반, 상놈이란 조선 사회의 신분 관념의 타파로 신분적 질서의 기반을 뒤흔드는 혁명적 주장을 외쳤다. 또한 쇄국의 문을 열었던 1876년 강화도 조약의 체결로부터 실로 98년 전(1778)의 해외 무역이 개방도 주장 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이단으로 몰린 천주교에 대해서“천주교는 불교의 별 차이가 없는 것이고 그 과학 기술은 불교에 없는 장점이다”라고 하면서 당시의 보수파의 질서를 무릅서고 나라를 위하여 소신을 표명 하기도 했다. 그리고 국방론에 있어서도 유비무환의 선진화를 주장하기도 했다.
1801년 ‘흉서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 되었다가 1805년 풀려 나왔다. 저서로는 ‘정유사고’,명농초고‘, ‘유정집’ 등이 있다. 그는 가고 없지만 그들이 남긴 족적은 오늘의 고국의선진화의 인식을 새롭게 하고 있다. 이국의 삶을 살아가는 동포들도 직업에 귀천 없고 학문의 차별없는 평등한 나라에서 배타적인 고정 관념을 버리고 상생의 삶을 살아가기를 기원 해본다. 성경은 말합니다. “교회나 사회생활에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보다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구원을 얻게 하라”고 하십니다(고전10: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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