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농 회고전 맞으며… 내가 느낀 그의 작품세계
▶ 위진록 <수필가>
현대서예의 개척자로 일가를 이룬 고 하농 김순욱 박사 회고전의 개막식이 지난 12일 LA 한국문화원에서 열렸다. 이날 오프닝에는 생전 하농 선생의 지도를 받거나 함께 서예활동을 했던 제자, 동료, 가족, 지인들이 200여명이나 찾아와 고인이 남긴 마지막 작품들을 감상했다. 전시장에는 의학박사이면서 서예가로 50년 동안 활발하게 활동해온 하농 선생의 전통서예와 현대서예 및 전각작품들이 60여점 전시돼 있다. 서예의 고정관념을 깨는 작품들로서, 컨템포러리 아트로 보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예술성이 높은‘서’의 진수를 보여준다. 개막식에서 아내 김옥환 여사(오른쪽 두 번째)가 유족을 대표해 인사말을 전하고 있다.
고전의 울타리서 탈피
예술로 승화된 묵흔
획 하나 하나에 압도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나는 고 하농 김순욱 선생의 개인전에서 참으로 뜻밖의 체험을 하면서 놀란 일이 있다.
전시회에는 하농 선생의 현대서 작품들이 주로 전시되었는데 작품을 둘러보다가 한 작품 앞에 섰을 때 내 눈을 의심하였다.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로 60cm 세로 120cm 정도의 족자에 엷은 주홍색 물감과 연한 먹물로, 그것도 틀림없이 글자로 보이는 바탕에 겹쳐, 칠흑 같은 무수한 한자들이 무질서하게 그러나 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난무하고 있었다. 무슨 글자인지 판독할 수는 없지만 그 획 하나, 하나의 속도감에 압도당하였다. 그리고 그 글자들이 발산하는 에너지가 어쩌면 황막한 광야를 울긋불긋 군기를 앞세우고 질풍처럼 들이닥치는 군마를 상상하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아! 이거로구나! 이것이 현대 서예구나, 하고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그 감동은 옛날의 고전적인 명필들 왕희지, 구양순, 저수량, 안진경 등의 글을 그대로 임서하는, 그대로 베껴 쓰는 작업에서는 받을 수 없는 감동이라고 할 것이다.
옛 사람들이 남겨 놓은 묵흔 그 자체도 물론 훌륭한 예술이다. 그들은 평균 약 1,500년 전에 산 사람들이니까 시대적으로 서양의 고전 음악가들과 비교할 수는 없으나, 서양음악이 요한 세바스찬 바흐 이후 오늘날까지 300년도 안 되는 기간에 얼마나 많은 변천을 거듭하였는가를 생각할 때, 서예는 1,500년을 제자리걸음 한 거나 다름없다.
회화, 문학, 건축 등 모든 예술 역시 시대의 요청에 따라 변화해 오면서 향수자(享受者)들 가까이에 다가서려고 몸부림쳐 왔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서예가 이른바 고전에 머물러 있어도 되는가, 언제까지 고전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그것은 서예의 종말을 자초하는 일이 아닌가, 하고 하농 선생은 걱정하였다.
“서는 서라는 울타리 안에서 다른 분야와는 교류가 없던 폐쇄된 예술이었으나 이제 그 울타리를 벗어나야 할 때다”라고 설파하고 하농 선생은 우선, 뉴욕에 현대서의 씨를 뿌리고, 미국 각처는 물론 한국, 일본, 중국, 대만 등을 두루 순회하면서 현대서 보급에 힘써 왔다. 그러나 현대서가 탄탄한 궤도에 오르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친구의 한 사람으로 애석함을 금할 수 없으나 이미 씨는 뿌려졌다. 하농 선생의 뜻을 이어가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고, 현대적인 붓글씨가 보고 싶다는 사람도 늘어나리라고 믿는다.
지금 LA 한국문화원에서 열리고 있는 하농 회고전을 생각하면서 현대서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우선 하농 선생의 작품 앞에 한 번 서 보라고 권하고 싶다. 새로운 감동을 체험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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