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산은 쉽게, 혼인엔 겁먹은 젊은이들 증가
▶ “상대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아직 준비 덜 돼서…” 갈수록 ‘사회 승자들의 대관식’ 처럼 위상 높여가 “경제적 기반 없어도 아이는 OK” 와 대조적 현상
안나 페레즈(35)는 다섯 살 때 도미니카공화국에서 이민 왔다. 언제나 싱글벙글하는 그녀는 탄탄한 체구에 성격도 화끈하다. 세상에 겁날 것 없는 ‘여장군’ 타입이다. 그러나 늘 당당한 그녀도 두 아이의 아버지를 할렘 아파트에서 쫓아내던 날 밤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수만 가닥으로 찢어지기라도 하듯 눈물부터 쏟아낸다.
그가 뒤처리만 깔끔하게 했어도 모른 척 눈감아 줄 수 있었다. 사내는 원래 그런 종자라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이들 아버지는 전혀 조심스럽지 않았다. 게다가 없는 살림을 거덜 내면서까지 공을 들인 상대는 하필이면 페레즈 친구의 여동생이었다. 이 모든 사실을 알았을 때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녀의 뚜껑이 활짝 열렸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이성적인 판단을 할 여유가 없었다. “기저귀와 우유를 필요로 하는 아이들을 내팽개치고, 어린 계집애에게 돈을 쏟아 붓는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그녀는 악을 썼다.
분노는 짧은 순간에 무서운 속도로 확대 재생산을 거듭했다. 회오리치는 감정의 여울목 속으로 빠져든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식칼을 집어 들었다.
그 섬뜩한 상황에서 가슴 밑바닥을 뚫고 시뻘겋게 끓어오르는 살의를 가라앉힌 것은 홀로 남겨질 새끼들에 대한 걱정이었다.
버러지 같은 사내를 죽이면 죄 없는 아이들이 대가를 치러야 할 판이었다. 그녀 주변에는 교도소에 들어간 엄마를 대신해 자식을 돌봐줄 만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10년 전 그날 밤, 그들의 관계는 거기서 끝났다. 그 이후 지금까지 그녀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사랑은 지나갔지만, 혈육의 정은 그대로 이어졌다. 지금도 그는 조지(16)와 브라이아나(10)를 찾아온다. 아버지라기보다는 친구 같은 존재다. 아이들의 양육에 그는 전혀 발언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그녀는 올해로 6년째 줄리안 힐(39)과 동거중이다. 그와의 사이에 아이도 생겼다. 벌써 네 살이다. 페레즈에게 부바는 세 번째 자식이다.
힐은 스킨헤드족처럼 머리를 박박 밀어버린, 껑충한 키의 흑인 남성이다. 푸른 체크무늬 와이셔츠에 말끔한 크림색 신사복을 받쳐 입고, 노란색 타이로 맵시를 살린 그는 아이들에게 곰살갑게 군다. 자신의 핏줄뿐 아니라 다른 두 아이들에게도 헌신적이다.
이번 가을까지 그녀는 금융서비스 회사에서 일했다. 그녀가 집안의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페레즈를 처음 만났을 때 힐은 공증인이자 모기지 클로저였다. 가끔씩 주식투자에도 손을 댔다. 둘은 최근 조그마한 공증-모기지 사업을 시작했다.
“난 워런 버핏처럼 생각한다”는 힐은 “내 목표는 억만장자지만 거기에 조금 못미처 백만장자가 된다 해도 나쁠 것 없다”며 허풍을 쳤다. 그러나 그들의 현재 수입은 “중산층의 맨 밑바닥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둘은 벌써 일년 이상 동거했으나 결혼을 하기 전까지 최소한 일년을 더 기다릴 작정이다.
지난 한 세대가 지나는 동안 미국인의 가족생활은 외양과 내용 모든 면에서 많은 변화가 찾아왔지만 연구원들은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변화로 두 가지를 꼽는다.
첫째는 사생아 증가다. 교육 수준이 가장 높은 계층을 제외한 모든 여성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둘째는 결혼의 위상변화다. 한마디로 주춧돌에서 갓돌로 위상이 달라졌다. 성인 초반기의 토대 다지기 행위로 간주되던 결혼이 성인 후반의 대관식으로 격상됐다고 보면 된다.
이 두 건의 추세는 서로 연관되어 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가끔씩 오해를 사기도 한다.
미혼부모는 세상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부주의하고 근시안적인 쾌락주의자가 아니다. 그보다는 결혼을 너무 대단하게 생각한 나머지 지레 겁을 집어먹은 소심한 사람들이다. 우연찮게도 이 부류에 속한 젊은이들의 숫자는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결혼은 시간이 지날수록 문화적 지위를 더욱 굳건히 다져가고 있다.
결혼은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들여놓은 낙천적 애송이들이 넘볼 영역이 아니다. 이제 결혼은 사회의 승리자로 자리매김한 사람들의 문화적 표시가 되었다.
반면에 출산은 문화적 현상이 아니라 인과관계가 확실한 자연적 생리현상이다. 출산은 평생동안 지속될 사랑의 유대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결혼과 차별화된다.
동거유형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온 코넬대학의 정책 분석 및 관리학 교수 켈리 무직에 따르면 동거커플은 결혼에 대해 지나치게 높은 기대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를 쉽사리 뛰어넘지 못한다. 자신이 설정한 아득한 높이의 바에 그만 주눅이 들고 만다. 바를 뛰어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이들은 저울질만 계속한다.
결혼을 겁낸다 해서 상대와의 관계 자체가 못마땅한 것은 아니다. 남녀관계가 다 그렇고 그런 것이다 보니, 만나서 유쾌한 사람과의 사이에 아기가 들어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재정적으로 부모가 되기에 그리 만족한 입장은 아니지만 아기를 갖는다는 것은 신참 아빠와 엄마 모두에게 여전히 기쁜 일이다.
최근 중산층의 이혼율은 떨어졌고, 이들의 가정생활은 이전에 비해 훨씬 단순해졌다. 반면 빈민층의 가정생활은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한 가정에 아버지가 다른 여러 명의 형제들이 함께 산다.
그러나 에딘 박사는 저소득층 아빠들이란 모두가 하나 같이 정자만 싸지르고 꽁무니를 뺀 후 자녀 부양비나 떼어먹는 얌체족이라는 허상을 깨어버렸다.
병원에는 아기의 출생신고서에 서명하기 위해 몰려든 독신 ‘아빠’들로 북적인다. 출생신고서에 아빠로 이름을 올리게 되면 결혼 여부에 상관없이 법적으로 부양책임을 져야 한다. 부양비를 지급하지 않으면 교도소 신세를 져야 한다.
5년이 지난 후에도 법적 미혼인 아빠들은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씩 자녀를 방문했고 절반가량은 매주 몇 차례씩 아이들과 계속 만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페레즈는 “시청에 가서 혼인신고를 하려고 했지만 힐이 반대했다”고 말했다.
힐은 “근사한 결혼식을 위해 이제까지 기다렸는데 지금 와서 혼인신고만 하는 것으로 때우고 싶진 않다”며 “페레즈에게 꿈의 예식을 선사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려면 최소한 1년 이상 참고 기다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을 미루는 셈이다.
<뉴욕타임스 특약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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