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안수산 여사 별세
▶ 11세 때 아버지 생이별 해군장교 복무 여장부 한인사회‘정신적 지주’
지난해 열린 백수연(99세 생신잔치)에서 안수산 여사가 3.1여성동지회 회원들의 축하를 받는 모습. <박상혁 기자>
24일 LA 자택에서 별세한 안수산(100) 여사는 한인사회에서 정신적 지주와 같은 존재이자 한인 이민역사의 산증인이기도 했다.
안 여사는 평생 미국에 살면서도 아버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유훈을 간직해 한국인의 정체성을 잊지 않은 여장부로 한인사회를 든든히 지켜준 버팀목과 같았다.
1915년 로스앤젤레스(LA)에서 태어난 안 여사는 불과 11살이던 1926년 집을 떠난 아버지와 생이별했지만 아버지 도산 선생과의 기억을 잊지 못했다.
안 여사는 아버지를 수려한 외모의 자상하고 다정하신 분으로 특히 자신을 각별히 아껴주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도산 선생이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 하와이, 멕시코 등 세계전역을 돌아다닌 탓에 아버지의 모습을 본 것은 일생에 7년 정도지만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은 잊을 수가 없다고 아버지를 추억하기도 했다.
항상 정직을 강조했던 아버지 도산을 자주 언급하기도 했다. 안 여사는 지난해 본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정직을 강조한 아버지의 말을 항상 떠올리며 거짓됨 없이 모든 것을 대하려고 노력했으며 미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미국이란 나라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되 한국인의 뿌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는 도산 선생의 가르침을 가슴 깊이 담고 살았다고 강조했다.
안 여사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8.15 광복절이라고 밝힌 적도 있다.
안 여사는 “평생 이 날만을 위해 아버지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맞서 왔기 때문이었는데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임종이 가장 마음에 남는다”고 목소리를 낮춰 주위를 안타깝게 하기도 했다.
안 여사는 해군 정보장교로 재직할 때 사귄 아일랜드계 미국인 프랜시스 커디와 결혼해 1남1녀를 뒀다. 가족들과 고급 레스토랑 ‘문게이트’를 운영한 안 여사는 1960∼1970년대 도산공원 건립계획이 진행되면서 아버지의 나라 한국과 본격적인 교류를 시작했다.
소장하고 있던 도산 관련 자료들을 기증해 조국의 독립기념 사업을 도왔고, 미국 교민사회에서도 동포 신문인 신한민보, 흥사단, 3.1 여성동지회 등의 단체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안 여사는 2003년 출판기념회 등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안 여사는 “내가 미국에서 한국 사람임을 잊지 않았던 것은 ‘한국 정신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아버지의 당부 때문”이라며 “아버지가 살아계시다면 ‘남북이 분단됐는데 너도 통일을 위해 무엇을 해야만 하지 않겠느냐’고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들 필립 커디는 “어머니는 아시아계로서 자부심을 늘 가져왔고 여성으로서 남성 중심의 세계에 뛰어드는 걸 두려워하지 않은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어머니 안 여사를 평가했다.
<박주연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