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순(수필가)
옛날 사람들이 ‘미끈 6월’이라고 했던 유월이 미끈하게, 훌쩍 지나고 말았다. 그동안 학생들은 학기말 시험, 종강, 졸업 등으로 바빴을 것이고, 좋은 계절에 수익을 올려야 하는 상업위주의 한인들도 바빴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여행하느라 바쁘지 않았을까. 나는 토요한국학교 학생들의 종업식 준비, 연극 연습으로 바빴고, 문인들의 향연인 문학지 출간 기념에 대한 기대, 참석 등으로 분주했다.
그 바쁜 틈새로 바라본 거리의 초록은 내 숨통을 틔워주는 좋은 풍경이었다. 내 시선이 닿는 초록물결은 나를 잠깐 멈춰 서게 해주었고 신선하고 상쾌했다. 그럴 때면 나는 이상이 쓴 수필 ‘권태’를 떠올렸다. 이상은 왜 초록에 대해 그 많은 불평을 늘어놓았을까? ‘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 놓였을꼬?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먹었노?’ 너르게 펼쳐진 푸르른 녹색을 조물주의 몰취미로 몰아세우며 공포의 시선으로까지 바라보았던 것이다.
벽촌으로 요양 차 갔던 이상의 권태는 일제강점기 천재지식인의 시대적 무력감. ‘나’와 ‘나’를 둘러싼 질병과 궁핍의 상황,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무미건조함. 극권태에 이르게 한 자의식 과잉. 망국의 시대에 태어났음에도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시피 한, 짖어야 함에도 짖지 않는, 본능조차 상실한 개와 인간들과의 비유적 조롱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런 이상의 체험적 ‘권태’속에 삶의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희망이 없는 삶은 절망이다. 그저 지리하고 답답해서 ‘죽는 것을 생각하는 것 하나만은 즐거웠다’는 대목이 이해될만한 구절들이다. 하지만 그의 글 ‘권태’ 속에 응시하고 있는 생에 대한 열망은 ‘초록빛’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처한 시대와 평범할 수 없었던 인생에 대한 슬픈 응시의 햇살. 매일 같은 일을 계속하는 노역으로 권태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잠드는 농민들을 보며 ‘이 흉악한 권태를 자각할 줄 아는 나는 얼마나 행복 된가’라고 썼던 것이다.
이상은 부정적 언어들 속에 초록색깔의 염원을 숨겨놓았다. 자연의 푸르름조차 방심상태인 시골사람들에게, 나라 잃은 동족들에게, 이상은 외치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깨어나라 깨어나라. 병들고 힘없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칼 같은 펜’으로 쓰는 것 밖에 없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권태’라는 허무의 비극적 수필을 탄생시켰던 게 아니었을까.
나는 걱정이 있을 때, 외롭고 슬플 때, 혼자 있고 싶을 때, 누군가가 그리울 때, 수목이 우거진 초록 숲으로 간다. 그곳에서 책을 읽거나 푸른 잎들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모습을 본다. 푸른 잎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내게 속삭이며 미소 짓는다.
초록의 생명 앞에서 나는 이 여백에 무슨 그림을 그려 볼까 라는 상상만으로 벌써 즐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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