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이 노래는 6.25전쟁의 끔찍한 아픔을 기억하기 위해 해마다 6.25 기념식 때 불렀던 노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은 후 구 소련의 스탈린의 군사적 지원을 받은 김일성의 북한군이 최신형 탱크와 무기들을 앞세우고 미처 군대를 제대로 편성하지 못한 남한을 남침하여 불과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질풍처럼 남쪽으로 진격했다.
그 당시 우리 집 가정도 큰 위험에 놓였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운송회사에 군부대로 트럭 차출을 요구 받았다. 아버지는 징집 나이가 지난 분이었지만 징발된 차량들을 회수하기 위해 자원하여 종군 했다.
아버지가 떠난 뒤 할머니, 어머니와 나는 생계와 아버지의 안전을 걱정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었다. 그렇게 1년여가 지나고 연합군이 북진하여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의 참전으로 패퇴를 거듭해서 북한군이 내가 살던 마산시의 무학산 뒤쪽까지 쳐들어 왔다. 다급해진 시청 직원으로부터 우리 가족에게 피난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어머니는 작은 배를 구해 할머니의 친한 친구가 사는 거제시 인근의 조그만 시골 어촌으로 떠났다.
나는 그곳에서 매일 아침 할머니를 따라 고요하고 깨끗한 바닷가에 나가서 조개며 바닷물 속의 바위에 엉켜 붙어 있는 미역을 따기도 하고 어머니가 만들어 준 낚시대로 물고기를 잡으며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었다. 떠난 지 1여 년 만에 아버지가 우리 차를 몰고 건강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 오셨다. 나는 아버지가 그렇게 귀한 사람인줄 그때야 비로소 알았다.
6.25 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전쟁으로 300만 명 이상의 인명이 희생되었으며 전쟁으로 인한 참화가 얼마나 끔찍한 비극을 불러일으키는지를 상기시켜 준다. 54년이 지난 지금의 남북한의 가공할 군사력은 옛날과 비할 바가 아니다. 만약 전쟁이 다시 일어난다면, 남북한은 공멸하고 말 것이다. 한반도에 전쟁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주변의 열강들을 설득하여 항구적인 남북한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켜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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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김 그린벨트,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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