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에서 기독교 다큐영화 사상 최단기간에 10만 관객을 달성하여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서서평’이 워싱턴에서 상영되었다. 조선의 가난과 아픔을 등에 업고 살다간 푸른 눈의 여인 ‘작은 예수’ ‘조선의 마더 테레사’라는 별명을 얻은 여선교사의 일대기다.
본명은 엘리자베스 오한나 세핑(Elsabeth Johanna Shepping)으로 독일 비스바덴에서 태어나 9세에 미국으로 이민와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1912년 32세에 한국에 왔다. 1934년 54세의 젊은 나이에 풍토병으로 인한 영양실조로 영면하기까지 독신으로 22년 동안 봉사했다. 미국 이름 Shepping을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라 개명하고 옥양목 저고리와 검정치마를 입고 남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된장국을 좋아하며 당시 일제점령기에 한국의 궁핍한 지역으로 의료혜택을 받지 못했던 광주 지역을 중심으로 제주도와 추자도 등에서 간호선교사로 활동했다.
미혼모. 고아. 한센인. 노숙자등 가난하고 병약한 사람을 만나면 그냥 지나가지 못하고 닦아주고 먹이고 입혀주며 업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간 간호사이다. 진정한 예수님의 정신을 삶으로 실천한 선교사다. 겸손과 섬김의 삶을 살아서 희생과 사랑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 일생이다. 그녀가 입양하여 키운 고아가 14명이요, 오갈 곳 없는 과부를 가족처럼 품어 집에서 38명과 같이 생활한 서양 선교사라니 존경과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최초의 여성신학교 이일학교를 설립하고 이혼당한 여자와 과부 나이가 들어 학력이 초과한 부녀자들을 모아 교육하고 마약퇴치 금주 운동을 전개한 그녀는 상처 받은 사람만이 아는 뼈저린 아픔을 뜨겁게 안아준 한센인의 어머니였다.
그녀가 남긴 건 담요 반장, 동전 7전, 강냉이 가루 2홉 뿐이었다. 한 장 남았던 담요는 이미 반을 찢어 다리 밑 거지들에게 나눴기에 반만 남은 것이었다. 임종 때는 자신의 시신을 의학용으로 기부하고 돌아갔다.
광주 제중원에서 그의 시신이 떠날 때 많은 여성이 소복을 입고 흐느끼며 따랐고 광주 최초의 시민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를 때 광주시민과 나환자들이 ‘어머니! 어머니! ‘를 부르며 오열했다.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지금까지 행한 일이 뭔가... 신앙의 본질을 되묻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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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규 은퇴 목사 실버스프링,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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