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미국 생활을 시작했을 때 새로운 문화에 적응해 가는 과정에서 나를 부끄럽게 만들어 주었던 기억 중의 하나가 화장실 에피소드이고 다른 하나는 남을 배려해 주는 사회적 환경에 대한 기억이 인상적이어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특히나 도로를 횡단하는 오리 가족이 안전하게 길을 건너갈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 주는 운전자들의 아름다운 모습은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랄만한 멋진 풍경이었다.
맥클린에 살던 작은 아들이 직장을 따라 버몬트로 이사할 때 미처 가져가지 못한 차를 갖다주어야 했기 때문에 우리 내외는 그 차를 타고 먼 길을 떠났다. 가는 길이 너무 멀어서 운전하기에 힘들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객지 생활을 시작한 아들네 식구를 만난다는 기쁨과 한창 재롱을 부리며 예쁜 짓을 하는 손녀의 모습을 상상 하면서 고속도로를 달렸다.
뉴욕을 지나서 2시간여를 달려가다가 길옆에 서 있는 안내 표지판을 보고 휴게소 화장실을 찾아갔다. 급한 마음에 좌우를 살펴볼 겨를도 없이 안으로 들어갔는데 이상하게도 화장실 안은 한가해 보였다. 당연히 화장실 문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한국 문화에 젖어 살아 온 나로서는 다른 사람이 오기 전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에 문을 노크했더니 안에서 응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두서너 군데 문을 더 두드려 보아도 상황은 똑같았다. 그제야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주변을 둘러보니 화장실 입구에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이 보였고, 그분들이 나보다 먼저 와서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서야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내 행동을 제지하는 사람도 없었고 그렇다고 나무라는 사람도 없었지만, 상황 파악을 한순간 어찌나 부끄 러운지 고개를 수그린 채 밖으로 나오면서 앞을 보니 노인 한 분이 내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빙긋이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일단 밖으로 나와 주변을 서성이다가 다시 화장실 입구에 늘어서 있는 줄 맨 뒤로 가서 차례를 기다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정말 부끄러운 기억이었지만 내게는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낯선 문화와 생활환경에 적응하느라 애를 쓰던 미국 생활 초기에 늘 궁금했던 것 중의 또 하나는 남자 화장실에 있는 소변기였다. 남자 화장실에는 여러 개의 소변기가 설치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유독 낮은 소변기 하나가 늘 눈에 띄었고 그 용도가 궁금했다. 처음에는 키 작은 어린이들이 사용하기 쉽도록 설치해 놓은 것으로 여기면서 역시 아동 중심 교육의 발상지답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 모임에 참석했다가 화장실 입구에 도착했을 때 의료보조기가 부착된 휠체어를 탄 남자가 화장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 순간 걱정이 되어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분은 한순간도 머뭇거리지 않고 낮은 소변기 앞으로 가서 아주 여유롭게 용변을 본 후 그 자리를 떠났다. 여유로운 모습으로 화장실을 떠나던 그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아하, 그거였구나”라는 말을 하면서 그동안 풀지 못했던 숙제를 해낸 기분이었다.
거동이 불편한 사람을 돕는 것은 성한 사람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는 하지만 그 점을 배려하고 실천하기는 그리 쉽지 않은데 아주 소소한 일에까지 관심을 두고 배려해 주려는 마음가짐에 “역시… 선진국”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배울 때마다 신기하기도 하고 낯이 설어 실수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가는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로 생각하면서 그때마다 “경험이 선생”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런 저런 경험을 해 가면서 시작했던 미국 생활이 지금은 많이 익숙해졌고 새로운 관습이나 문화에 동화되어 가고 있는 것은 내게 ‘경험’이라는 선생 덕분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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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성/수필가,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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