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복 사례 적지 않으나 불치병이란 고정관념 팽배
오스카상 후보로 유력시되는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 주연배우 러셀 크로우는 노벨상 수상자인 천재 수학자 포브스 내쉬 주니어가 편집광적 정신분열증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이 질병이 불치의 것이고, 내쉬의 경우가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일반인들뿐 아니라 정신과 의사 중에도 정신분열증이 불치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프로이트와 그 추종자들의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회복된 환자들을 심층 추적한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정신분열증이 치유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라고 한다.
여동생이 근 50년간이나 이 병으로 고통받은 이 병에 대해 수십년간 연구하고 많은 논문을 쓴 워싱턴의 정신과 의사 E. 풀러 토리는 "이 병에는 회복이란 게 없다는 고정관념이 뿌리깊지만 치유되는 경우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습니다"고 말한다.
매서추세츠의 정신과 의사이자 이 분야의 운동가인 대니얼 피셔는 그 자신 정신분열증을 극복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그는 25세에서 30세에 걸쳐 세 번이나 정신병원에 입원했었지만 완치되었다. "완치된 사람들이 그 사실을 얘기하면 다들 아마 진단이 잘못됐을 거라고들 합니다" 생화학박사로, 정신병을 앓은 뒤 의대에 진학한 피셔의 말이다.
정신분열증은 치유가 힘들다는 믿음은 1972~1995년에 걸쳐 미국, 서유럽, 일본에서 행해진 최소한 일곱 개의 연구 결과에 의해 반박되었다. 정신병원 퇴원 후 20년 이상이 지난 상태를 관찰한 이 연구들은 46~68%의 환자가 완치-정신병 증상이 없고 치료약을 먹지 않으며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는 경우-되거나, 내쉬의 경우처럼 한 가지 기능만 손상된 채 크게 개선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들 환자들이 다양한 치료를 받긴 했으나, 연구자들은 증상이 개선된 것은 40대 중반부터 나이에 듦에 따라 질병을 관리하는 능력이 생기는 것 덕분이기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무렵엔 정신분열증을 일으키는 것으로 여겨지는 뇌 속의 화학물질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20대와 30대 시절 열 번이나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프레데릭 프레시(61)는 사람들이 치유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은 "정신병자라는 낙인이 찍힐까 두려워서 아무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프레시는 자신은 완치된 것은 아니지만 매우 좋아졌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는 심리학 박사로, 15년간 오하이오주에서 제일 큰 웨스턴 리저브 정신병원의 심리학 책임자로 일했다. 그는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와 노던 오하이오 유니버시티 의과대학의 교수직도 갖고 있고, 전국 정신건강 소비자협회의 회장을 지냈으며, 25년간의 결혼생활을 영위하면서 네 아이의 아버지 역할도 하고 있다. 27세 때 정신과 의사가 그에게 "평생을 정신병원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다.
정신분열증은 전형적으로 사춘기 내지 성인 초기에 발병한다. 이 병으로 고생하는 미국인은 220만명에 이른다. 생물 및 환경적 요인이 교묘하게 복합하여 발생하는 것으로 믿어지는 이 병은 때로 너무 심해서 약도 듣지 않자 자살하는 사람이 진단 받은 사람의 10%가 넘는다. 어떤 사람은 병 때문에 약물중독, 노숙, 가난 같은 다른 심각한 문제까지 안게 된다.
많은 환자들이 50, 60대에 이르러 환상이나 환청 같은 가장 심각한 증상만 덜해지지만 발병 전의 정상생활로 되돌아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회복 케이스가 늘고 있지만, 회복 정도를 측정할 기준이 없는 것도 문제다. 학술적인 연구자들은 약을 사용하지 않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어야 치유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환자 경력이 있는 이들은 프레데릭이나 내쉬처럼 스스로 증상을 관리할 수 있으면 치유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내과의사이자 정신과의사인 프랜신 쿠르노스는 정신과 의사들이 전통적으로 증상과 능력을 구분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정신병 증상이 있으면서도 업무는 충실하게 해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정신분열증 환자였다가 정신과 의사가 된 피셔는 자신의 치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전문직업인 집안 출신이라는 것, 교육을 받았다는 것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병이 낫도록 도와준 것은 약이 아니라 사람들입니다. 나를 믿어준 정신과 의사, 내편에 서준 가족과 친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지요. 내가 커리어를 바꿔서 의사가 되는 꿈을 추구한 것 또한 매우 중요했습니다"
이글 스카웃에 고교 풋볼팀 스타, 훈장이 번쩍이는 해병대원이었던 모 암스트롱은 월남에서의 전투 이후 21세에 정신병으로 불명예 제대했다. 이후 10년간 샌프란시스코의 거리와 부모의 집이 있는 일리노이 남부에서 자기가 프란시스코 성인인줄 알고 살며 아무 치료도 받지 않은 채 알콜과 마약에 중독된 그는 70년대 중반에야 재향군인병원에서 정신과 치료를 시작, 술과 마약을 끊고 뉴멕시코로 가서 대학을 졸업하고 석사학위까지 받아 정신건강소비자 운동가가 됐다. 1993년부터 보스턴에서 책임 있는 직책도 갖고 6년 전 역시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은 적이 있는 여성과 결혼까지 한 그에겐 매일 매일이 투쟁이다. 병이 재발하지 않도록 일상생활에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원하던 직업 군인의 꿈은 접었지만 나는 회복될 만큼 된 것 같다. 아직도 나갈 길을 찾고 있는 ‘스카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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