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실패 끝에 세워진 첫 영국식민지
담배 재배 성공이 주민생존 가능케 해
2007년 5월은 미 대륙 첫 번째 항구적 영국 식민지인 제임스타운이 건설된 지 400주년이 되는 달이다. 오늘날의 미국을 가능케 한 이 마을 건설의 역사적 의미를 살펴본다.
크리스토퍼 컬럼버스가 처음 미 대륙을 발견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제 없다. 그보다 훨씬 전 바이킹족이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왔다는 증거가 여러 곳에서 발견됐고 무엇보다 1만5,000년 전 인디언들이 베링 해협을 건너 온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 세계를 가능케 한 역사적 사건으로서 컬럼버스의 미 대륙발견은 분명 의미가 있다. 유럽 열강의 식민지 정복 등 근대사를 신대륙 발견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부 사학자들은 컬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지난 500년간 최대의 역사적 사건”으로 평하기도 한다.
그만은 못하지만 존 캐봇의 미 대륙 탐험도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컬럼버스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제노아 출신인 그는 컬럼버스가 스페인에 고용되었듯이 영국에 고용돼 북미 대륙을 탐사했다. 그 때가 1497년이니까 컬럼버스보다 불과 5년 뒤다.
캐봇의 탐험 이후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아메리카 개척을 위한 영국인의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됐다. 이들은 이미 스페인에 의해 장악된 중남미 대신 북미 대륙을 집중 공략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1583년 영국의 귀족 험프리 길버트는 광대한 미 대륙의 영토를 차지해 분배하고 북미의 인디언을 잡아오겠다는 야심을 품고 뱃길에 올랐다. 천신만고 끝에 지금의 캐나다 뉴펀드랜드 지방에 도착했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은 황무지뿐이었다. 가물에 콩 나듯 인디언 구경을 하기는 했으나 이들은 백인만 보면 쏜살 같이 도망치는 바람에 잡지도 못했다. 굶주림에 시달리던 이들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귀국 길에 풍랑을 만나 길버트는 익사하고 만다.
이같은 좌절에도 불구하고 1584년부터 1587년까지 이번에는 지금의 노스캐롤라이나인 로아노크 섬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된다. 1587년 존 화이트는 121명을 이끌고 이 섬에 도착하며 그해 8월 미 대륙에서 태어난 첫 영국인인 버지니아 데어를 낳는다. 인근 원주민과의 관계 악화와 식량난으로 존립이 위협받자 화이트는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영국으로 떠난다. 곧 바로 돌아올 예정이었지만 공교롭게 다음해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쳐들어오는 바람에 발이 묶이고 3년 뒤인 1590년에야 로아노크에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남겨둔 식민지인들은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고 나무에 ‘크로아토안’이란 글자만 새겨져 있을 뿐이었다. 이들의 운명은 지금까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1607년 5월 14일 지금 버지니아에 세워진 제임스타운은 이같은 역경을 딛고 탄생했다. ‘수잔 콘스탄트’ ‘갓스피드’ ‘디스커버리’ 등 세 척의 배를 타고 신대륙에 온 104명의 영국인들은 동부 해안 일대를 오르내리며 나름대로 최적지를 선정해 당시 영국 왕이었던 제임스 1세를 기념, ‘제임스타운’이란 이름을 붙이고 정착했다.
그러나 이곳은 인간이 살기에는 최악의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우선 식수원이 없어 인근 강물을 길어먹어야 했는데 이 강은 바닷물이 밀려들면 짜고 빠져나가면 진흙이 섞여 먹으면 배탈이 나기 일쑤였다. 거기다 인근 늪지대는 말라리아 모기 서식지였으며 주변 인디언은 툭하면 공격해왔다. 사방에 널려 있다는 황금은 보이지 않고 사람들은 기아와 질병으로 쓰러졌다. 첫 겨울을 지내며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 그 후 영국은 추가로 보급 물자와 정착민을 보내왔으나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으며 나중에는 자기 아내를 죽여 소금에 절여두고 먹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세워지자마자 사라질 위기에 놓인 제임스타운을 살린 것은 담배였다. 이주자 중 한 명인 존 롤프는 양질의 담배 재배에 성공, 이를 영국에 수출하고 인디언 추장 포우하탄의 딸 포카혼타스와 결혼, 인디언들의 관계 개선에도 기여한다. 1616년에는 포카혼타스와 영국을 방문, 왕을 알현하기도 한다.
제임스타운은 그 후 100년 동안 버지니아의 중심지로 발전하며 버지니아를 초기 식민지 가운데 지도자적 위치에 올려놓는다. 독립선언서를 쓴 제퍼슨이나 독립군을 이끈 워싱턴, 연방 헌법을 초안한 매디슨이 모두 버지니아 출신이란 것만 봐도 버지니아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제임스타운 탄생 400주년을 맞아 미국 역사를 다시 한번 돌이켜 보자.
제임스타운 탄생 400주년을 맞아 이곳을 방문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기념관을 둘러보고 있다.
‘큰 추장 엘리자벳’
흥미진진한 미 초기 식민지 건설사
영국의 사가 자일스 밀튼이 쓴 ‘큰 추장 엘리자벳’ (Big Chief Elizabeth·사진)은 무모한 험프리 길버트에서 미 대륙 개척을 열렬히 지지하다 억울하게 런던 타워에 갇혔다 처형당한 월터 롤리,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로아노크의 ‘잃어버린 식민지’(Lost Colony), 제임스타운 생존에 혁혁한 공을 세운 존 스미스와 포카혼타스 이야기 등등 초기 영국인들의 아메리카 대륙 이주사를 스토리 중심으로 흥미롭게 다룬 책이다.
이 책을 보면 16세기 영국인들이 처음 얼마나 신대륙에 대해 낭만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나와 그것이 현실과 부딪치면서 어떻게 부수어지나를 생생히 볼 수 있다. 영국인들이 처음 신대륙에서 기대했던 것은 황금과 향료와 비단을 구할 수 있는 동방으로 가는 항로였다. 그러나 이는 결국 신기루였음이 판명되며 담배 재배에 성공하고서야 식민지는 독자적 생존 능력을 갖게 된다.
이 책에서 충격적인 것은 당시 사람들의 야만성이다. 제임스타운 주민들은 기아와 질병이외에도 엄격한 법령에 시달려야 했다. 이웃집 꽃을 꺾는 정도의 범죄는 물론 교회에 세 번 빠지는 정도의 잘못도 사형으로 다스려졌다. 잔인한 정도는 이웃 인디언들도 마찬가지였다. 교역을 하러온 영국인들을 잡아 산채를 가죽을 벗기고 배를 갈라 내장을 불태우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유럽인의 이주로 결국 피해를 본 것은 인디언들이었지만 초창기 식민지 거주자들도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과 어려움을 이겨내며 지금 미국의 기반을 닦아나갔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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