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텅 빈 마루에서 홀로 잠이 들면
호랑이 한 마리 산에서 내려와 나를 물고 갔다 한다
고요한 한낮 지나 서서히 해가 저물녘
깊은 잠에서 깨어나 사방을 두리번거리면
호랭이한테 물려갔다 돌아온 게지
식구들은 웃으며 말하곤 했다
(중략)
뜨거운 호랑이 아가리에 물린 채
몇 개의 산과 들을 뛰어넘는 동안에도
나의 깊은 잠은 끝없고
오직 지나가는 바람만이 귓가에 윙윙거릴 뿐
(중략)
호랑이 입에 물려
집으로 오는 동안
화르르 져 내리는 꽃잎 속에 아슴아슴 먼 길이 떠오르고
마악 대문을 열고 마실 나서는 어머니가
에그머니나 놀라 외치는 소리에 옛다 내던지고
호랑이는 다시 먼 산으로 가버린 것일까
지금도 잠이 들면
나를 데려가기 위해 다가오는 호랑이의 나직한
발소리가 들린다 내 귓가를 맴도는 더운 숨결 내 몸에 와 닿는
타는 눈빛 내 잠 속에서 한껏 아가리를 벌리고
단숨에 나를 삼켜버리는
저 호랑이
남진우(1960~) ‘먼 산 먼 길’ 일부
호랑이한테 물려가지 않았던 사람은 하나도 없네. 낮잠에서 깨어나 까닭 모르게 서러웠던 날의 햇살이랑 뻐꾸기소리. 그날처럼 ‘뜨거운 호랑이 아가리에 물린 채’ 몇 고개 넘어봤으면. 아슴아슴한 몇 구비 세월을 넘어봤으면. 아무리 낮잠을 자고 일어나도 호랑이한테 물려갔던 기억을 찾아낼 수가 없네. 호랑이한테 물려갔다 온 거라는 말해주는 이 아무도 없네. 그때의 호랑이들, 식구들은 다 어디로 갔나?
한혜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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