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올인>의 촬영 장소로 유명해진 제주도 섭지코지에는 육지에서 문화 체험학습을 하러 온 단체 학생들로 북적거렸다. 그 중 전남 담양에서 왔다는 어느 고등학생이 등대를 향해 올라가는 나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분명 입구에 섭지코지는 ‘협지(狹地)와 곶(串)이 합성된 제주도 토박이 말’이라고 뜻까지 표시되었고, 인솔 교사가 목적지를 밝혔을 터인데 어디라니.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다른 학생에게 또 한번 놀랐다. “제주도에서 어디가 가장 인상 깊었어요?”라고 물었더니 “있어요. 그런데…무슨 일출봉이었더라”라고 말꼬리를 흐리다가 친구들이 기다린다며 황급히 달아났다. 자신이 어디에, 왜 왔는지도 모르고, 마음에 남은 곳 조차 기억 못하는 여행이었다면 그것은 시간ㆍ돈ㆍ체력 낭비가 아닐까.
새로운 경험 또는 스펙을 쌓으려고 봉사활동ㆍ컨퍼런스ㆍ해외연수 등을 이유로 여기저기로 떠나는 여름방학에 자칫 그런 낭비를 가져올 수 있다. 물론 최근 <온워드>라는 책을 낸 스타벅스의 하워드 슐츠처럼 여행을 통해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 밀라노 출장 여행중 우연히 호텔 앞에 있는 커피숍에서 바리스타가 우유 거품을 만들고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리며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주의 깊게 관찰한 슐츠에게 그것은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휴식이 아니라 하나의 색다른 문화 체험이었다. 그는 미국에 돌아와 밀라노 커피숍의 체험을 재현하려고 시도한 결과 스타벅스를 만들어 냈다.
적어도 무료한 공부ㆍ점수 레이스ㆍ학기중 찌든 고민에서 벗어났으면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자아를 발견하여 조금 다른 모습으로 변해 제자리에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여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깨어짐, 즉 자신이 가졌던 편견과 불완전한 지식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눈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화석화된 인식을 바꾸려는 노력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슐츠는 여행지에서 느낀 것을 간직하는 방법으로 영국의 미술 평론가 존 러스킨이 말한 스케치 테크닉을 활용한 사람이다. 똑같이 여행을 떠났지만 한 사람은 방문지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다른 한 사람은 현지에서 경험한 색다른 문화를 수용, 이식했다. 보고 느낀 것을 나름대로 분석하고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버릇은 자신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능력을 갖게 한다. 사진ㆍ글ㆍ아이디어로 재창조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경험에 대한 깊은 이해, 뚜렷한 기억을 남기게 한다. 그것이 무엇에 유용할까 의아해 하겠지만 대학의 지원서 에세이로부터 직장의 기획안 발표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에서 독특한 색깔을 내게 한다.
무조건 떠나 스펙쌓기에 급급하기 보다 떠나야 하는 뚜렷한 이유 그리고 열린 마음이 준비되어야 한다. 아니면 알랭 드 보똥이 <여행의 기술>에서 지적했듯이, “여행의 위험은 적절하지 않은 시기에, 즉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물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정보는 꿸 사슬이 없는 목걸이 구슬처럼 쓸모없고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된다.”
나아가 캐나다 몬트리올 대학 교육심리학 연구팀이 밝혔듯 여행 후유증은 학생들에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여가와 현실 사이를 헷갈려 학업에 흥미를 잃거나, 집중력이 흐려지고, 지구력이 감소되어 일상에 다시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마치 신혼여행에서 막 돌아온 여교사처럼 말이다. 그녀가 수업을 시작하려는데 학생들이 “쌤, 신혼여행 이야기 해주세요”라고 졸라댔다. 그러자 여선생이 말했다. “자~그만들하고 공부하자. 모두 책 벗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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