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영(자유기고가)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 성탄의 계절에 다시한번 생각해 본다.
인간이 자신에게 아픔을 준 사람을 스스로 완전히 용서할 수 있을까? 완전한 용서는 어떤 용서일까? 완전할 수는 없어도 인간으로서 온전한 용서는 할 수가 있는 것일까? 시간 속에 잊혀져가는 것을 용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자신의 의지나 이로 인해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땅을 파고 묻어놓는 것을 용서로 생각 할 수도 있다. 그런 것들을 용서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바람이 불면 다시 살아나는 불씨같은 형태로 임시 저장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충분히 되갚을 시간이나 힘이 있을 때에도 그들이 여전히 죽어있을 수 있을까? 나의 기억속에 확연히 떠오르는 몇 사람들이 있다. 순간순간 그들을 향한 미움, 혹은 분노(그것들은 내게 주어진 아픔의 변형된 모습일 것이다)를 없애고자 하는 마음은 늘 갖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그 아픔이 담겨진 화로위에 바람이 불면 사라졌던 불씨는 어김없이 다시 타오르곤 하였던 것을 기억한다. 시간은 용서의 도구가 아니라 어쩌면 용서를 담는 그릇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용서는 그 시간 속에 우리의 어떤 바램, 그리고 그 바램을 실제화 할 수 있는 진정한 방법이 주어져야 비로소 용서가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용서한 이와 용서 못한 이의 구분은 어떤 순간 나 자신의 가슴에 떠오르는 상대에 대한 생각에 의해 어느정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느낌이 순간의 감정에 따라 흔들리지 않을 때, 늘 평온과 나아가 상대를 향해 이해를 넘어선 사랑의 마음까지도 드는 것을 느낄 때, 그 아픔은 더이상 용서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그리고 누군가의 축복을 위한 도구로 변화되었음을 경험할 수도 있다. 그것은 고통과 아픔을 승화시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에게 무엇인가를 원하고 그를 볼때가 아니라 자신을 들여다 볼 때 완전한 용서의 실제를 보게 되는 것 같다.
절대자의 존재와 능력을 믿는 신자로서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가슴에 부대낄 때, 그를 제쳐두고 다른 이들을 사랑하게, 혹은 신을 사랑하게, 그래서 그의 일을 할 수 있게, 혹은 누군가를 향한 신의 축복을 구하는 기도는 어쩌면 위선이고 신앙, 혹은 그 기도를 받는 절대자를 향한 기만일 수밖에 없다. 그 기만과 위선을 느낄 때, 어쩌면 스스로에게 강제적으로도 상대를 향한 기도, 즉 용서를 위한 절대자의 도움을 간구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간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상대의 마음의 변화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절대자가 가장 중요한 곳을 만지는 것을 경험한다. 나의 마음, 상대의 마음 그 모두를 바꾸어 진정한 사과와 화해가 싹트게 한다. 성탄의 시기에 신의 나에 대한 용서를 생각한다. 그리고 나의 가슴 속에 존재하는 아픔을 준 이들을 향한 완전한, 온전한 용서를 그에게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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