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 옛 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한데 화려했던 성은 허물어져 빈터위에 방초만 무성할 뿐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지만” 사라져간 역사 속에 고려시대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혜성같이 나타나 한 시대를 풍미하고 떠난 걸출한 영걸이었던 태종 무열왕으로 불리는 “김춘추”(604-661, 신라29대 왕)를 소개 하고자 한다.
김춘추는 진지왕의 손자이지만 아버지는 이찬을 지냈고, 어머니는 진평왕(신라26대왕)의 딸 천명 부인으로 한쪽만이 왕골인 진골이었다. 조부 진지왕이 정란황음의 혐의로 왕위서 쫓겨나 왕위 계승이 외조부인 진지왕으로 됨에 따라 성골 왕계에서 철저히 외면당한 결과였다. 그러나 김춘추는 변화무상한 정쟁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야심찬 통찰력과 카리스마의 기질로 야망에 찬 의지를 펼치기 시작 했다.
그 당시 진흥왕(534-576)이후 중국과의 문물 교류가 확대됨을 기회로 그의 야망을 펼칠 것을 다짐하던 차에 자기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가야 왕계의 김유신(596-673)을 만나게 되었다. 나이는 비록 김유신이 9세 위였지만 서로가 왕의 외손자 이면서 권력에서 소외 된 처지라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이들 관계가 긴밀해 지면서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와 김춘추가 혼인하여 김춘추를 매제로 맞아들임으로써 밀착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7세기 중엽 통일 과업의 달성으로 직결되는 역사적 해후이기도 했다. 두 김 씨는 상호 보완적인 입장에서 민족 발전에 역사적 사명의식으로 분발했던 것이다.
그 무렵 국제 정세는 수나라와 당나라가 교체되는 격동기로써 국내에서는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의 협공을 방어하는 데 여념이 없었던 시기였다. 선덕 여왕이 왕위에 오른 후 백제의 침공은 가속화되어 642년(선덕여왕11), 의자왕(?660)은 윤충을 시켜 대야성을 함락 시키고 말았다.
이 때 대야성을 지키던 김춘추의 사위와 딸은 장렬하게 전사했고, 김춘추는 고구려와 손잡고 백제를 멸하기 위해 고구려에 들어갔으나 오히려 유폐당하고 말았다. 두달 뒤 풀려나온 김춘추는 호국의 의지와 통일의 대한 염원을 가지고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여 수차례 당을 왕래하며 군사적 후원을 다짐 받았다.
진덕여왕이 후사없이 죽자 그는 50의 늦은 나이에 최초의 진골왕으로 즉위하고 외교 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나당 연합군을 결성하고 김유신과 왕자 법민(문무왕(?681)에게 5만의 대군을 주어 백제를 진멸 시켰다.
그는 제위중에 당시의 문물을 도입하고 9개 군단을 설치한 후 “국난 극복과 삼국 통일은 이 시대의 지상 명령이자 역사의 소명이다, 통일 대업을 달성하라“고 유언 하였다.
오늘을 살아가는 동포 사회에서도 이민1세들이 아름다운 발자취를 남겨 후손들이 계승토록 하였으면 한다. 성경은 “너희는 도를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하신다(야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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