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맛좋고 다양한 한국라면을 미국 수퍼마켓에서도 살 수 있지만 30여년전엔 한국라면은 고사하고 한국식품점 자체가 드물었다. LA에서 2년 가까이 연수하는 동안 일본의 ‘이치방’(一番) 라면을 거의 주식처럼 먹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그 꾀죄죄한 자취방에 물씬 배어 있던 이치방 라면의 미소냄새가 코끝을 간질이는 듯하다.
시애틀에 10여년전 전근오자 이치방이 아닌 ‘이치로’(一郞)와 친숙하게 됐다. 일본출신의 시애틀 매리너스 간판선수인 그가 고교동창인 金一郞과 李六郞 군을 연상시켰다. 미국과 중남미의 덩치 큰 선수들이 판치는 메이저리그에서 가녀리게 보이는 동양인 선수가 톱타자로 나와 거의 매 경기마다 안타를 때리는 모습이 신기하고 기특해 보였다.
이치로 스즈키는 이젠 일본과 시애틀은 물론 미국과 온 지구촌 야구팬들에게 친숙한 이름이 됐다. 성씨인 스즈키는 일본에서는 한국의 김씨, 이씨처럼 많다. 이름인 이치로 역시 태어나는 아들 순서에 따라 이치로(一郞), 지로(二郞), 사부로(三郞), 시로(四郞), 고로(五郞) 등으로 붙여지는 평범한 이름이다. 이치로는 사실은 장남이 아닌 차남이다.
이치로가 매리너스 입단 후 작년까지 11년간 세운 기록은 경이적이다. 첫해인 2001년에 안타 242개를 때리고 그해 아메리칸리그의 신인왕과 MVP 타이틀을 거머쥐며 본바닥 야구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한 시즌 최다 안타(262개, 2004년), 생애통산 3,000안타 돌파(2008년), 10년 연속 200안타(2010년) 등은 불멸의 기록으로 꼽힌다.
그가 세운 매리너스구단 신기록 중에는 통산 타율(.331), 통산 단타(1,825개), 통산 3루타(71개), 통산 도루(382개) 등이 포함돼 있다(2010년 기준). 2007년 올스타전에서는 사상최초로 장내홈런을 기록했다. 올스타전에 3년 연속(2001~03) 최다득표로 출전한 것도 신기록이다. 그의 경기를 보기 위해 일본 팬들이 지금도 시애틀에 몰려온다.
그런 이치로가 올 시즌부터 톱타자에서 3번타자로 내려앉았다. 이치로 아닌 사부로가 된 셈이다. 나이(38)의 무게 탓인지 작년 시즌에 죽을 쒔다. 타율 0.272와 안타 184개를 기록하며 10년 연속 3할대 타율과 200개 이상 안타행진이 멈췄다. 올스타전에도 못 나갔다. 지난 22일 구단이 타순변경을 발표하자 이미 예상한 듯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이치로는 ‘살아있는 야구전설’이라는 칭송을 듣지만 팀 성적보다 개인기록에 너무 집착한다는 비판도 듣는다. 그의 기록행진과 관계없이 매리너스는 꼴찌행진을 계속한다. 연봉(작년 1,700만달러) 대비 팀 기여도 면에서 메이저리그 전체선수 883명 중 868위의 ‘쓸모없는 선수’로 꼽히기도 했다. 한국의 추신수(연봉 398만달러)는 388위에 올랐다.
이치로는 특히 한국인들에게 밉게 보였다. 그가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한국야구는 일본을 30년간은 못 이긴다”고 했다는 말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한국기자가 ‘삐딱하게’ 와전시킨 것이고 사실은 “단순히 이기는 것만이 아니라 상대팀이 앞으로 30년간은 일본에 손대지 말아야겠다고 느끼도록 압도적으로 이기고 싶다”고 말했었다.
한인들 입장에선 이치로는 혐오 아닌 긍지의 대상일 수 있다. 여전히 홈팀의 간판스타이다. 특히 추신수와 백차승을 매리너스에서 끝내 못 보게된 한인 야구팬들에겐 그가 ‘꿩보다 닭’의 위안이 될 수 있다. 야구로 입신하려는 꿈을 가진 우리 2세들에겐 훌륭한 롤모델이다. 한인사회에도 중국의 게리 락, 일본의 이치로 같은 상징적 인물이 나와야 한다.
지난 11년간 출루를 위한 단타 위주의 톱타자였던 이치로는 올 시즌부터는 이미 누상에 나가 있는 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이는 장타위주의 클린업 트리오로 역할이 바뀌었다. 그는 일본의 오릭스 블루웨이브 시절 투수로도 활약한 전천후 선수이다. 이미 그의 전매특허인 ‘시계추 타법’을 개량해 다리를 넓히고 자세를 낮춘 광각타법을 연습 중이다.
벌써부터 올 여름 ‘코리아 나이트’ 경기에서 이치로가 호쾌하게 만루 홈런을 날리는 장면을 보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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