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탈북자이지만 다른 탈북자를 만나기가 무서워졌습니다.”러시아 벌목공으로 3년을 일하면서 섭씨 영하 50도의 추위 속에서도 살아남았던 김 호(가명·45)씨는 2003년 탈북자의 밀고로 북송될 뻔했던 사건을 생각하면 지금도 등에 땀이 난다. 광동성의 모처에서 식당을 운영할 때였다. 세 번의 시도 끝에 2000년 마침내 한국 입국에 성공한 뒤 대한민국 여권을 가지고 중국에 다시 와 사업을 하던 시절이었다. 하루는 종업원으로 일하다 그만 둔 탈북 청년이 전화를 걸어왔다. 탈북자 8명이 탈출을 하려 하는데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믿고 나갔던 김 씨는 중국 공안원들에게 곧 체포돼 몇 개월을 감옥에서 고생해야 했다. 그가 북송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히 중국 돈으로 2만원이나 되는 벌금을 낼 수 있었고 대한민국 여권을 소지했던 탓이었다. 체포될 당시 그 청년은 김 씨를 잠시 만나는 척 하더니 사라져버렸던 기억이 남아있다. 애난데일 모 식당에서 만난 김 씨는 “나를 밀고했던 그 탈북 청년을 며칠 전 미국에서 만나 너무 놀랐다”고 말했다. 뜻밖의 조우에 두 사람은 당황했고 얼떨떨한 상태에서 잠시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다.
김 씨는 그러나 죽을 죄를 지었다고 용서를 빌었어도 시원찮을 그가 더 당당한 모습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탈북자들을 팔아먹던 북한 첩자라는 확신이 들어 바로 주미대사관에 신고했다. 같은 북한 출신 주민들이 서로의 등에 칼을 꽂는 일도 비극적이지만 자신의 목숨이 다시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불안감도 크게 작용했다.
김 씨는 “이해할 수 없는게 중국내 탈북자들을 잡아들이는 짓을 했던 사람이 어떻게 미국까지 와 영주권을 받고 인권탄압을 받았던 탈북자 행세를 하며 돌아다닐 수 있는지 하는 점”이라며 “더욱 우려되는 것은 한국과 미국은 물론 전세계에 탈북자 행세를 하며 오히려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간첩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씨는 “그의 행태를 보면 나 말고도 많은 피해자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 된다”며 “탈북자들의 안전을 위해서도 가짜는 정말 색출돼야한다”고 강조했다.
탈북자 행세를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조선족 출신도 상당할 것으로 김 씨는 보고 있다. 외형적으로 전혀 구분이 안 되고 북한에 대한 정보도 조금만 노력하면 얻을 수 있어 탈북인 행세가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한인사회 또는 미국인들을 상대로 각종 모금을 하는 탈북인 가운데 의심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탈북자 사회에서 공공연한 비밀”이라며 “조용히 있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데 지나친 인권활동으로 문제를 키우는 것을 보면 걱정 된다”고 말했다.
1993년 바이칼호 북쪽 띤따라는 곳에 돈을 벌기 위해 벌목공으로 갔다가 조그만 라디오를 숨겨두고 한국 방송을 들으며 자유세계를 꿈꿨다는 김 씨. 그는 “자유의 상징인 미국에서 가장 잊고 싶은 사람을 다시 만났을 때 머리가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며 “복수가 아니라 다른 탈북자들을 위해서라도 이 문제를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겠다”고 말했다.
<이병한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